넌 뭐가 그리 느긋해?
비슷한 말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들어왔다. 왜 그렇게 느긋해? 행동이 조금이라도 느리면 간절하지 않은 걸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 사람이 좀 느긋하면 안 되나.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왜 그렇게 급해? 한글을 빨리 못 떼서 안달, 영어를 빨리 못 익혀서 안달, 학원 진도에 빨리 따라잡지 못해서 안달……. 못 잡아먹어서 안달.
아무리 한국이 빨리빨리의 나라라지만 이거 너무 빠르잖아. 하염없이 빠른 세상에 눈앞이 팽팽 돈 나머지 멸치 새끼마냥 두 눈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일까. 애들은 날 멸치 대가리라고 부른다. 내 진짜 이름은 너도 나도 모르는 눈치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가끔은 선생님들도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나. 하긴, 엄마도 내 이름을 모르는데. 오죽하면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보자마자 학원 숙제부터 찾는다. 숙제는? 하고. 얼굴은 비추지도 않은 채. 도어록 소리가 들리면 소파에서 튕겨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날 어떻게 골탕 먹여줄지 짱구를 굴리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내 이름이 숙제일 수도 있고.
평소처럼 어두컴컴한 방 책상 앞에 앉아 학원 숙제를 하던 날이었다. 특강이라는 이유로 많은 양의 숙제를 내주셨고, 빠른 시간 내에 할 리는 전무했고, 당장 내일까지 다 풀어와야 했고, 그래서 새벽이 훌쩍 넘어갔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페이지는 요지부동이었다. 답이 없는 방정식을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 이곳에서 도망치는 상상을 하는 것. 근데,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지. 한국에서 도망쳐봐야 한낱 멸치인 내가 어디까지 가겠나.
도망칠 수 없다면,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한 빨리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해야 했다. 할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었다. 부모님만 해도 빨리빨리 민족의 오랜 혈통인데 나라고 못 할 리가. 나도 빨리빨리 민족인 답게 빨리 수능을 끝내고 빨리 대학에 합격해서 빨리 대학에 졸업하면 적당한 회사에서 빨리 취업을 하고 빨리 승진해서 빨리 대리를 달고 빨리 맞선을 본 다음 빨리 결혼을 해서 빨리 아이를 낳게 되겠지. 흐음, 나 닮은 아들 하나에 미래의 아내를 닮은 딸 하나가 좋겠어. 아, 그리고 빨리빨리 문화를 빨리 내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빨리빨리 민족의 혈통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럼 내 아들 딸들은 빨리 한글을 떼고 빨리 영어 유치원에 가서 빨리 유학 경험을 하고 빨리 입시 학원에 다녀서 빨리 수능을 보게 될 거고 빨리 대학에 합격하면 빨리 졸업을 할 거고 국내든 해외든 빨리 취업을 하면 빨리 맞선을 볼 거고……. 아후, 숨 차.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대책 없는 미래 상상이었지만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떠오르는 부모님의 얼굴……. 난 아마 평생 느긋하게 살 팔자는 안 되나 보다. 엉망으로 풀어놓은 방정식 풀이를 지우개로 벅벅 지웠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지만 다들 정답만을 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추구하는 길은 오답일까. 엄마가 정한 길은 정말 정답일까. 어쩌다가 빨리빨리 민족이 되고 말았을까. 엄마도 아빠도 처음부터 빨리빨리 민족이었을까. 여전히 방정식 문제는 답이 없었다. 속이 더부룩한 게 체한 것 같아 배를 문질렀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엄마는 빨리빨리, 빨리빨리, 빨리빨리…….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내게 빨리 오고 있을까. 멀지 않은 미래니까 지금쯤 빨리빨리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내일이 조금 두려워졌다.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내일의 태양은 자비 없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빨리 오고 있겠지. 빨리빨리, 빨리빨리, 빨리빨리…….
엄마가 멋대로 정해준 빨리빨리 스케줄에 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효과가 있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집중력을 올려준다는 명상 후 숙제 검사를 했다. 정해진 숙제를 끝까지 다 해야만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고 머리에 좋다는 특정식을 남김없이 다 먹고 나서야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김없이 위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배를 부여잡고 학교 준비를 마쳤다. 학원에서 나눠준 영어 듣기 평가를 이어폰에 연결하면서 엄마를 벗어나 천천히 등굣길에 올랐다.
교실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20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간이었다. 텅 빈 공간에서 오는 평온함에 어깨를 내려놓으며 앞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만약 학교가 집에서 멀었다면 엄마가 빨리빨리를 외치며 차로 데려다줬겠지. 그럼 차를 타는 십 여분의 시간 동안 날 들들 볶았을 게 분명했다. 애들은 날 멸치 대가리가 아닌 멸치 볶음으로 부를 거고……. 그럴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감을 느끼며 천천히 1교시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