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이런 계획은 없었는데. 자책감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관자가 되기로 굳게 마음먹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데. 그렇게 계획을 세웠는데.
6년 만에 다시 기록이 깨질 대위기에 섰다. 참고 참아서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걸까? 이번만은 절대 참지 못 할 것 같았다. 귀도 막고 눈도 감은 채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알아도 모르는 척 살았는데. 결심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내 의지는 약해져가고 있었다. 반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에 울렸다. 이마에 손을 떼고 눈을 뜨자 멸치라고 불리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엉덩이에 풀을 붙여놓은 것처럼 자리에 앉아있었고 마리오네트 같은 인상을 풍겼다. 딱히 수업에 열중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성적은 좋게 나오는 편이라 알게 모르게 이 아이를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치열하게 등수를 앞다투어 경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 앞의 등수를 맡고 있는 아이였다. 이 남자아이는 언제나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문제집을 풀었다. 늘 울상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필 때는 책을 쥐고 있을 때뿐이었다. 도서실을 자주 찾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아이가 읽는 책을 볼 때마다 표지는 바뀌어져 있었다. 언뜻 판타지 장르의 제목을 본 것도 같았다.
이 남자아이의 주변에는 삼인방이 자리를 잡고 사냥을 노리고 있었다. 삼인방은 우린 반의 골칫거리였다. 담임의 골칫거리였다. 삼인방은 튀고 싶어 난리가 났는데 주에 한 번씩은 담뱃갑을 슬쩍 흘리며 나 담배 피우는 남자야,라는 것을 자랑했다. 자랑이 아닌 것도 자랑처럼 여겼다. 삼인방은 언제나 거들먹거리며 라이온 킹에 나오는 하이에나처럼 셋이서 모여 다녔다. 다른 반의 골칫거리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편의점이었다. 어디서 뚫었네 마네 큰 소리를 높였고 술독이 오른 것을 훈장처럼 여겼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별 다를 바 없는 별 볼 일 없는 아이들이었다.
골칫거리 외의 아이들은 평범했다. 학업이 고민인 아이, 연애가 고민인 아이, 다이어트가 고민인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가정환경이 고민인 아이도…… 있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엄마가 멋대로 용돈을 동결했다, 예체능 학원에 가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내준다, 아빠가 술만 취하면 쓸데없이 인형을 사 온다, 등의 이야기였다. 내가 봤을 땐……, …… 보이는데. 하긴 진짜 고민이었으면 말도 안 꺼냈겠지. 아무튼 아이들은 별 다를 바 없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평범했다. 옆에 앉은 아이만 제외하고서.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항상…… 무표정이었다. 감정이란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이 아이가 감정이 있든 없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다. 이상하게 눈치를 보고 눈길이 가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옆에 앉은 아이와 평범한 10대 여자아이들처럼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눈다거나 인사를 하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아무 관심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색깔로 따지면 회색 같은, 무색무취의 아이였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언제는, 이 아이가 멸치라 불리는 남자아이에게 눈길을 주는 것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바라본다기보다…… 어쩐지 구경에 가까웠다. 그때만큼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그 아이의 표정을 잠깐 읽을 수 있었다. 쌍꺼풀 진 기다란 눈에 동그랗게 안광이 비쳤다. 마치…….
팔에 소름이 끼쳤다. 옆을 지나가면서 아이들이 바람을 일으켰다. 술래잡기를 하는 듯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팔을 쓰다듬으며 생각과 함께 공책을 접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며칠 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연필을 든 손으로 푸석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창밖 너머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매미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