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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임 Nov 17. 2024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연필을 잡고 미친 듯이 공책에 휘갈겼다. 예전과는 다른 결의 계획이었기에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타인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실패로 이어질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방관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긴 했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선… 두려웠기 때문도 있다. 잡았던 연필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나는 지금 공포에 떨고 있었다.



멸치라고 불리는 그 남자아이는 소심하고 소심한 만큼 순진했다. 그래서 삼인방의 표적이 되었고 다른 누구도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 내 옆에 앉은 아이는 달랐다. 삼인방과 비슷한 결을 풍기는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오히려 애착 형성을 가지기 막 시작한 유년 시절의 어린아이의 형태와 닮아 있었다. 순수하지만 그래서 독이 될 수 있는…. 책상에 놓인 연필을 바라보니 불과 얼마 전 있었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학교에서 그 아이의 진짜 얼굴을 봤다. 그 아이가 연필을 손에 쥐던 것도 봤다. 여차하면 내려칠 기세로 고쳐 잡는 것도 봤다….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그때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깨에 소름이 끼쳤다. 이번엔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제때 방어를 할 수 있었을까? 그 아이가 아니더라도 피할 수 있었을까? 온몸이 두려움으로 장악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 밖에서는 엄마가 티비를 켜놓고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속 드라마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고민이 됐다. 내가 이 일에 끼어들어도 되는 걸까? 사실, 그 남자아이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삼인방이 못 살게 굴 때 모른 척했던 거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쓸데없는 정의감 때문이라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그만둘 수 있다. 그렇지만….



고마워…. 뭐가? 나한테 말 걸어줘서….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아이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별 의미 없던 말과 행동이었는데도 고마움을 느끼고 어렵사리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우물쭈물했던 거야? 어, 으응…. 나는 남자아이의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고작 말 몇 마디 건네준 것만으로도, 아는 척을 한 것만으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동안 외로웠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랑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래서, 그랬다. 그 남자아이의 말에 의미 부여를 하든 말든 솔직히 상관은 없었지만 그의 얇디 얕은 자존감이 안쓰러웠다. 그에게서 나는 나를 봤다. 어린 시절의 나를.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을까. 더 이상 못 본 척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정말, 그 남자아이는 정말, 우리는 정말 유약한 존재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방관자의 삶을 평생 살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도무지 고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 존재가 과연 도움이 될까? 내가 그 남자아이의 친구가 정말 될 수 있을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를 떠올릴 때면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무시무시한 맹수에게 노출된 가냘픈 토끼가 된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계획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유동적이지 못하는 나에게는 취약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최대한 여러 개의 계획을 세워뒀다. 플랜 A, 플랜 B, 심지어는 E까지. 성공할 수 있을까? 과거의 실패가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나만 잘하면 돼, 나만. 계획을 망치는 것도, 성공으로 이끄는 것도 전부 나야. 나뿐이야. 숨을 가다듬었다. 미친 듯이 긴장이 되어서 손에 땀이 흥건했다. 실패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내 주변 사람이 산산조각 나는 것도 이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거라 조금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멸치, 그 남자아이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게 내 계획의 일부이자 첫 단계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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