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황희 정승 일화에 여자 종들이 다툰 후 황희 정승에게 고하기를 "A종년은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하니, 황희 정승이 "네 말이 옳다"라고 했고, A여종이 와서 "B종년은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하니 이에 "네 말도 옳다"라고 말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황희 정승의 조카가 시비를 가려줘야지 양측 모두 '옳다'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이의를 제기하자, 황희 정승은 "네 말도 옳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전해져 흔히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조카의 사고방식과 입장에 서게 된다. 분쟁이 발생한 경우 어느 한 쪽은 옳고, 그 반대쪽은 그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양측 모두 옳을 수는 없다는 지배적인 사고 때문에 황희 정승의 답변은 모순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과 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하면 여종들간의 다툼에서 시비는 가려져야 하고, 모순관계일 수 밖에 없는데, 둘다 옳은 주장이라면 이것은 분쟁이 아니라 발전적 투쟁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종들이 상호 비방하는 태도를 보면, 발전적 투쟁은 아님이 분명하다. 모순적 분쟁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어떻게 둘 다 옳을 수 있을까. 판단기준을 달리 적용하면 A와 B의 각 주장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조카의 주장도 옳을 수가 있다. 비난은 변덕스러운 판단기준에게 가해진다. 그런 판단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조카의 주장이고 대부분 우리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판단의 문제, 시비의 구별문제 문제로 보지 않고 관찰과 수용의 태세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한다. 각 주장에서 옳은 부분을 관찰해서 찾아내고, 이를 수용하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이고, 모두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A와 B가 상대에게서 좋은 점, 옳은 점을 찾으려고 관찰하고, 그 접점에서 화해한다면 문제는 기준으로 구별하여 한쪽을 처참하게 패배시켜야 하는 투쟁이 아니라 관계가 더 발전될 기화일 수 있다.
이런 이상적인 접근에 대해 비판적인 제3자의 관점이 조카의 그것이다. 구경하는 입장에서 객관적이라고 자처하며 타인을 기준으로 가르고 평가하는 일이 좀처럼 간명하다고 생각하는 제3자의 착각이다. 제3자는 투쟁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흥분과 분노가 없는 상태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착각이 상당하다. 그런데 제3자의 이성과 합리는 무엇으로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지 또한 문제이다.
객관적인 기준이 구체적 현실과 상황에 꼭 들어맞는 것도 아닐 뿐더러 객관적이리고 신뢰했던 객관적 속성 또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동성을 가진다. 객관이 주관이 될 수 있고, 주관이 객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때문에 모두가 옳을 수가 있고, 모두가 그릇될 수도 있다.
투쟁에 빠지면 상대의 나쁜 점, 그릇된 점, 약점만을 관찰하려고 눈혈관이 붉게 팽창한다. 분노와 흥분도 증폭된다. 그런데, 투쟁과 분쟁의 과정에서 일회적이나마 상대의 옳은 점, 좋은 점이 혹시나 있지 않을지에 대해 관찰하고 존재한다면 이를 수용해서 화해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살면서 예민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을 때, 타자와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거나 그러한 조짐이 농후할 때, 너나 나나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관대한 호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