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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30. 2023

바다 위에서 비행기가 고장 났다

소설 같은 현실

가을이 중간쯤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은 길고 어디든 가고 싶었다. 나는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은 왠지 설레고 두렵고 그리고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나는 가을의 여행을 갈까 말까 여러 번 망설였다. 여기저기 다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인생에 대한 호기심이 다 떨어져서 인지 별로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릴 때는 비용이 문제였는데 비용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나의 마음의 문제였다. 편안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에 따르는 여러 가지 귀찮음이 생각나서 웬만하면 여행에 큰 관심이 일지 않았다.


나는 어렵게 여행을 결심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오랜만에 미국 중서부의 아름다운 가을을 즐기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며 A항공의 마일리지를 소비할 겸 시카고행 왕복을 끊었다. 시카고를 가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미네아폴리스에 가는 게 나의 최종 목적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저녁 비행기는 오랜만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라운지를 이용하다가 출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가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 주변에 꽉 차있었다. 국적기라도 저녁 비행기의 특징은 동남아에서 출발해서 인천을 경유해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 게이트 주변에 피곤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있거나 누워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람들 무리 뒤에 유리벽 밖으로는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멀리서 간간히 비행기 동체의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을밤이고 쓸쓸했다. 복잡한 게이트 주변을 보니 나는 문득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루가 마감되고 잠자리에 들 시간에 게이트 앞에서 앉을자리를 찾아 서성이며 있기보다 두 시간도 안 걸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피곤하단 생각을 하며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도 졸음이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완전히 내렸을 때 두 시간 정도 출발 시간이 지연된 후에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휴가철도 아닌데 만석이었고 나는 피곤하고 쓸쓸해서 눈을 감았다. 항상 그렇듯이 불안한 이륙이 지나고 곧이어 저녁 식사가 나왔다. 기분도 전환할 겸 나는 밥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 한 편이 다 끝나기 전에 다시 기장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보통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얼마 있다가 기장의 인사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밥까지 다 먹고 불이 곧 꺼질 시간에 다시 기장이 방송을 하는 게 참 이례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기장은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비행기는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는 결함이 발견되어 돌아가야 합니다. 다행히도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니 안심하고 기다려 주시면 인천 공한에 도착해서 다른 비행기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자 기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조용했다. 

비행기는 일본을 조금 지나서 태평양 위를 날고 있었다. 무사히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다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장이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니 그 말을 믿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나는 비행기 회항으로 시카고에 가는 도착시간이 늦어지면서 그날 시카고에서 미네아폴리스로 가는 비행기를 못 타게 될 것을 잠깐 염려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비행기가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출발부터 게이트가 미어터지더니 두 시간 지연해서 출발하고 이제는 비행기 결함이라 비행기를 돌린다고 하는데 화가 조금 나다가 말았다. 그저 비행기와 함께 바다 위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기장이 비행기 결함으로 더 이상 비행을 못한다는 멘트 방송이 나올 때 아주 순식간에 내 모든 살아온 인생을 이대로 마감해도 되나 하고 아찔했었다. 그때부터 인천 공항의 불빛이 보이고 착륙 준비를 하겠다는 기장의 방송이 나올 때까지 두 시간 정도가 정말 길었다. 드디어 기장이 착륙 전에 비행기 연료를 소진하기 위해 하늘 위에서 비행을 하다가 착륙하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연료가 많으면 안 된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게이트에는 항공사 직원들이 나와서 음료와 과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이미 옆 게이트에는 새로 갈아탈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승객들은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긴 연착에 회항까지 겪었지만 무사하니 다행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같이 연결 편을 타지 못하는 고객은 비행기와 호텔을 다시 예약해 주었다. 그날 새벽 세시에 다시 인천 공항을 출발했다. 모두 잠든 새벽에 다시 돌아온 인천공항에서 같은 도시를 향해 두 번째의 출발을 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유한의 삶을 살고 있는지 깊이 깨닫게 해 준 비행이었다.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조바심과 욕심이 생겨날 때, 내 마음대로 일이 안 풀릴 때가 있다. 태평양 바다 위에 떠 있는 비행기에 내 몸을 맡기고 오로지 무사히 착륙하기만을 속으로 기도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저 살고 싶어서 겸허해지던 순간을 떠 올린다. 그래, 나는 여기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욕심내고 심각하게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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