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난다
알약을 삼킨다
이제는 마실 것을 굳이 마시지 않아도 삼킬 수 있다
마실 것이 별로 없기도 하다
몸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 정도면 사실 충분하다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는 충분히 들어왔다
자리에 앉는다
컴퓨터를 켠다
이미 돌아가고 있는 많은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어떻게 돌아가나 확인하는 일뿐
사실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냉장고를 괜히 열어본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뭔가를 씹고 싶어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산 푸른 채소를 조심히 씹어본다
무언가를 씹어본 적이 언제던가
넘기기도 바쁘다
넘길 물조차 없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연필을 괜히 잡아본다
손이 너무 심심해서 뭐라도 그어보고 싶어서
집안 구석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던 연필을 찾아서
줄이라도 그어본다
무언가를 손으로 직접 써본 적이 언제던가
보기만도 바쁘다
쓸 필기구조차 없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왠지 머리가 아프다
‘스트레스용’이라고 휘갈겨놓은 글씨가 쓰인 스티커가 붙은 알약통을 집어 든다
2알쯤이면 나아질 두통 같다
머리가 더 아프기 전에 알약을 삼킨다
역시 삼킬 물조차 없다
꾸역꾸역 삼킨다
머리가 아픈 것보다는 낫다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오늘의 기분은 어떠신가요?”
대답하고 싶지가 않다
내 대답에 다시 들려올 대답 또한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줘.”
소파에 괜히 누워본다
언젠가 먹어보려고 하다 남겨둔 팝콘 부스러기들이 소파 옆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있다
봉지를 뜯은지도 며칠이 지나 눅눅하다
눅눅한 팝콘을 괜히 눌러보고
눅눅하게 다시 눕는다
안경을 쓴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으므로
‘잠 47’ 화면을 선택한다
잠 46까지 봤으므로
잠 47의 영상을 본다
잔다
일어난다
알약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