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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Youn Aug 19. 2020

시작과 끝은 언제나 다른 온도였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다른 온도였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발전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온도를 재보는 것이다. 내 일상을 방해할 만큼 벅찬 행복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느끼는지. 난 그로 인해 지금 얼마나 뜨거워지고 있는지.

 항상 뜨거울 때 시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뜨거워지려고 노력했다. 저절로 불타오르는 시작은 불탈 수 없는 삶의 무게들이 나 자신을 짓누르는 순간부터 서서히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내 삶이나 나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뜨거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무뎌진 걸 슬프다고 생각한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안됐다.




 뜨거움에서 시작되었던 관계에서 가끔은 짠 것들이 몰려와서 우리 관계의 끓는점을 높이기도 하고 가끔은 냉수마찰을 하기도 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에서 시작된 언쟁이 짜기도 했고, 그의 이성인 동료나 친구들에 대한 괜한 오해 때문에 짜기도 했다. 갖은 양념이 투입되니 짜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짠맛은 우리들을 더 말하게 하여 서로에 대한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자극제가 되었지만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내 모습까지 상대에게 보여주고야 말게 만드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짠맛을 없애려 물을 다시 탄게 누구이든 끓고 있던 감정에 해가 되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게 가끔은 냉수도 부어야만 했다.

 짜면 물을 부어가면서도 뜨거움까지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이 가끔은 노력 없이 얻어진 뜨거움보다 더 깊은 감정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뚝딱 만들어진 최고의 요리는 인스턴트뿐이다. 인스턴트 같은 맛에 여전히 당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스로가 엇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엇나갈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의 관계이고 인스턴트라고 해서 관계의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을 끓여왔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끓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끓이려는 필사의 노력이 중요했다. 끓이고 싶지 않아 졌을 때나 끓여도 끓여지지가 않을 때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천천히 온도를 낮춰가든 한 번에 스위치를 off 해버리든 결국엔 아무 온도도 느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만다.




 나는 모든 사랑이 끝나고 이별에 도달했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가 만들어낸 사랑을 제대로 맛봤다. 처음에는 짠맛이 났고 계속 씹어보니 불맛이 났다. 맛있다고도 할 수 있는 맛이다. 하지만 요리가 끝난 지 얼마가 되지 않아 혀가 데일 것처럼 뜨거워서 사실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만들어낸 음식을 전부 소화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겨 밀봉을 해서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이별 후에 1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넣어둔 음식을 다시 손톱만큼을 맛보았다. 차게 식은 온도에서는 모든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맛있는 맛이었다. 의외다. 냉장고에 박아두어서 쾌쾌한 맛이 날 것 같았지만 차가운 온도 때문인지 그럭저럭 맛을 더 알아간 것 같다. 이제는 냉동실로 장소를 옮긴다. 더 맛있는 맛 정도에서 멈추고 모든 것을 얼려버린다.




 이별 후에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가끔 냉동실 문을 열어 내가 넣어두었던 우리가 만든 손톱만큼 남은 음식이 잘 살아있나 구경한 적이 있다. 혹은 기억 저편 어딘가에서 내가 얼려놓은 다른 무언가를 찾다가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우리의 음식을 눈치채기도 했지만 애써 못 본 척한 적도 있다. 1년이 흘렀으니 마음 놓고 다시 먹어보기로 한다. 11개월 전, 그때의 좋은 맛이 날까 궁금하기도 하다.

 가장 맛있을 때 꽝꽝 얼려놓은 우리의 음식을 입에 몽땅 넣어보니 너무나도 시리다. 맛보지는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냉동고 기억 속 저편 어딘가에다 다시 음식을 박아둔다. 훌훌 정리할 수 없는 모든 관계들이 그렇게 냉동고에 남아있다. 우리가 스스로 끄고야 말았던 온도보다 더 차가워진 모습으로. 차가워진 것은 나쁜 게 아니다. 다시 뜨거워질 나와 당신 그리고 비워야만 채워 넣을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온도이다.




 가끔은 냉동고에 찌질하게 남아있는 갖은 음식들이 날 괴롭게 할 때도 있다. 본격적인 정리가 필요한 건 언제나 냉동고 쪽이 아니던가. 묵은 때를 벗겨내듯 냉동고 속의 음식들을 정리해도 냉동고에는 그 음식의 향이 남는다. 음식에도 역시 냉동고의 향이 난다. 모든 것들이 뒤섞인 향! 냉동고마저 정리해야만 할 때는 참 괴롭다. 모든 것이 뒤섞여 우리인지 나인지 모를 것을 떼어내는 기분에 나는 미처 모든 정리를 끝 마지치 못하고 다시 끓기에 집중하러 냉동고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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