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의 아내들에게 드리는 편지
안녕하세요 제수씨. 오랜만입니다. 운성이 돐때뵙고 처음이네요. 별일 없으시죠?
여과장 통해서 가끔 제수씨나 애기들 얘기 듣습니다. 가족들 얘기를 할때면 그 어떤 고객과 미팅을 할때보다 말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난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농담입니다.ㅎ 특히 얼마전에 운성이가 뒤집는데 꽂혔다는 말을 할때는 내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모든 부모들처럼 비장함도 엿보였습니다.^^
어제도 여과장 많이 늦었죠? 술도 많이 먹은거 같던데 밤에 접대끝나고 집에 가면서 이제 복귀한다고 그래도 직속 상사라고 보고전화를 하더라구요. 혀 다 꼬부라진 목소리로요. 제수씨께 죄송했습니다. 원래 제가 나가야하는 자리였는데 몸이 안좋아서 여과장이 대타로 나간 접대였거든요. 죄송합니다 제수씨.
가끔 영업사원의 아내로 사는게 영업사원으로 사는것 만큼 힘들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싫고 힘든 포인트가 다 다를거 같아요. 저희 집사람은 가족과 같이 있을때 제가 고객과 전화를 계속 오래하는 걸 정말 싫어했습니다. 아마 어떤 아내는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게 싫을수도 있고 외박하는게 싫을수도 있고 '영업하려면 필요해' 하면서 담배를 안 끊는것도 싫을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의 모든 영업사원은 아내들에게 죄인일수밖에 없는거 같네요.
그런데요 제수씨. 오늘 전 그런 죄인들의 변호사가 되볼까 합니다. '우리가 더 힘들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같은 결혼지옥 예능프로에서의 식상한 대사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더 이해해주고 더 봐달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결국은 그런거겠네요. 다만 그냥 회사에서 이래저래 힘들겠지라고 생각하는 거 보다는, 아주 자세히는 아니어도 영업사원이어서 힘들수 있는 부분을 조금만 엿보셔도 훨씬 더 더 따뜻하게 웃어 주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끝까지 읽어 주실거죠?
영업사원은 숫자에 민감 합니다. 실적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무슨 과일열매처럼 그럴싸하지만 결국은 숫자입니다. 지금 숫자가 좋으면 나중에도 좋아야 할텐데라는 걱정으로 연옥이고, 지금 숫자가 나쁘지만 나중엔 좋을 거 같으면 지옥이고, 지금도 나쁘고 나중에도 희망이 없어 보이면 생지옥이 되거든요. 결국 실적을 늘 생각하면서 살고 그게 일으키기도 무너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숫자를 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게 동료들과의 광란의 술자리일수도 있고 가끔 터지는 희열넘치는 수주일수도 있고 취미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집사람과 가장 크게 한 부부싸움이 뭔지 아세요? 정말 철없는 영업사원 시절, 주말마다 야구를 하러 가겠다고 한적이 있었죠. 그때 한참 준희가 어려서 집사람 힘들때였는데 주말마다라니. 미친거죠 한마디로.
여과장 농구 좋아하지요? 회사 농구동아리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에이스 입니다. 농구 보내 주세요. 여과장이 농구를 할때는 그 얼굴에 오로지 농구만 생각하고 재밌어 하는 게 보입니다. 숫자에 대해서는 복소수는 커녕 자연수도 생각하지 않아요. 농구보내주세요. 여과장은 저처럼 철부지가 아니어서 제수씨와 잘 상의할 겁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힐링은 애기들이랑 놀면서 하면 되지 않냐는 얘기는 설마 안하시겠죠? 그건 생일선물로 아이에게 학용품을 사주는 거랑 똑같습니다. 애기들이랑 노는 거 어쩔땐 숫자보다 더 힘듭니다.ㅎ 그치만 도넘게 간다고 하면 꼭 채찍을 드시기 바랍니다.ㅋㅋ
가끔 가족들과 식당을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할때 가게 주인과 지나치게 계산적이거나 협상적으로 얘기해도 이해해 주세요. 직업병입니다. 영업사원은 항상 기회를 찾고 설득을 하고 무언가를 더 얻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직접 그 분들과 딜을 하지 않아도 제수씨가 한 딜을 보고 뭐라고 할 수도 있고 한심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자기가 나서는 건 안하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참 한심하죠? 하지만 그거 이해해 주세요. 직업병입니다. 밖에서는 경유차이다가 집에서는 전기차로 변하겠어요? 이해 부탁드려요. 그리고 가끔은 제수씨가 생각하지 못한 용기와 스킬로 영업사원 남편의 기량을 유감없이 일상에서 발휘하는 사건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때 조금은 고마워 해 주시고 자랑스러워 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싫은 술도 많이 먹습니다. 누군가는 영업사원이 회사돈으로 술먹는다고 할 지 모르지만, 불편한 자리에서 먹는 술은 싫습니다. 안먹고 싶습니다. 그냥 점심정도로 접대하고 싶어요. 근데 그럴수 없잖아요.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들어와서 애들 볼 부벼도 그냥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도로만 살짝 뭐라 하세요. 그리고 잘 눕혀 재워 주세요. 자기도 좋아서 먹은 술이 아닌데 너무 와이프가 뭐라하면 속상하거든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왜 영업사원이 됐냐고 핀잔도 들을 거 같고 약해보이기도 하니까 큰소리치면서 싸우게 되죠. 적당히만 혼내시고 애들만 보호하시면 됩니다.ㅋㅋ
아이고 이거 뭐 편지라고 드렸는데 마치 항소이유서처럼 돼 버렸네요. 죄송해요 제수씨. 그렇다고 여과장이 늘 지옥에서만 사는 건 아니니 걱정마세요. 좋은 사람들이랑 밥도 먹고, 고민도 나누고, 조금씩 조금씩 좋은 남편, 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영업인으로서의 커리어도 잘 쌓아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편지를 쓰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답장을 받으면 좋겠다는 거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영업사원의 아내로 살면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계실 거 같아서요. 그리고 왠지 그 글은 난 이게 싫어, 이럴땐 이렇게 해줘의 내용이 아니라 싫은 술을 먹고 변기에 토하고 있을때나 수주에 실패해서 잠시 세상이 무너질때, 난 그래도 이런 여자랑 살아, 난 아이들에게 파란 하늘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일거 같아서요. 그래서 양복 안주머니에 사표대신 넣고 다닐 부적이 될거 같아서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닭살멘트 해볼까요? 현실성은 좀 없는 멘트지만 가끔 여과장 얼굴이 어두워 지면 이렇게 말해주세요.
"난 당신이 영업사원인게 자랑스러워. 누구보다도 특화된 자본주의의 정실소생이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운성이, 운제를 굶기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술 조금만 먹고 힘내"라고.
환절기네요. 건강 조심하시고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운성이 결혼식때 꼭 뵙겠습니다 제수씨. 안녕히 계세요.
PS : 편지를 쓰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같이 기분이 붕 뜨네요. 그렇게 귀여웠던 운성이가 벌써 사춘기라니. 예나 지금이나 영업사원들은 변함이 없는 데 그 가족들은 아이들은 크고 있었네요. 운성이 결혼식때 뵙겠다는 약속이 그리 멀지많은 않게 느껴집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제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