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진짜로

by 유조


이건 일기예요.

며칠째 윗집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요. 어제는 시험 두 개를 보고 과외를 다녀왔습니다. 14시간 동안 밖에 있었습니다. 손목에는 토끼 발톱에 길게 긁힌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이제 따갑지는 않아요. 내가 열네 살 때 다녔던 영어 학원에는 흰색 모비딕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며칠째 윗집에서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집에 있기 어려워요. 어제 열네 시간 동안 바빴어서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요. 나는 가끔 시끄러운 소리를 골이 찢기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갑니다.

이건 일기예요. 이해하지 못할 만한 어떤 것도 여기에는 없어요.

급하게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탔습니다. 실은 창가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요. 결국 좋은 날씨 너머로 열린 창을 등지고 앉았습니다. 눈앞에 딸기 케이크가 있습니다. 맨 위에는 설탕 방울이 굳어 반짝거리고 있고, 딸기에는 꼭지가 있습니다. 반달 모양으로 시멘트처럼 쌓인 조각들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종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어요.

얼빠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 남산은 좋은 동네구나. 아마도 그곳의 진짜 조그만 창문 틈새로 남산타워가 보여서 그랬던가봐요. 나는 남산 가까운 곳에 산 적이 있습니다. 걸어갈 거리는 못 된대도요. 버스 정류장 서너 개 정도 거리는 걷습니다. 그 긴 길에 사람이 아무도 없길래 노래를 불렀습니다.

계단에서 올라온 사람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언뜻 모범생 같은 넥타이를 본 것 같았지만 평일 낮이었고, 근처에 학교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계단을 끝까지 다 올라와 카운터로 향합니다.

이건 일기예요. 가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꿩비둘기라고 부르는 동물. 오후 5시가 되면 음소거가 해제된 것처럼 들리는 새 소리. 건너편에는 아직 지지 않은 겹벚꽃이 있고 이편에는 길게 늘어선 반들한 회양목. 워커의 신발끈. 파이의 윗면. 토끼의 따근한 핏줄. 담뱃불의 열기. 성냥을 들고 뛰는 하얀 치아. 열린 입꼬리.

가게를 보고 카운터로 몸을 돌리던 그 사람의 얼굴에 그런 것들 ㅡ 하얗게 깎이지 않는 경탄이 눈에 있어서요.

너무 예뻐서 생각했어요 - 저런 눈에 넥타이라니 진짜 너무 반칙이다. 걱정 마세요. 난 원래 쉽게 사랑에 빠져요.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너무 많아요. 아마 최초의 사건은 친해진 길고양이의 눈이었죠. 거기 우주가 있었다고 적어놓고 몇 번을 영원처럼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름은 잊었는데요. 생각해보니 너무 속상해요.

자폐적이지 않은 사랑에는 좀 서툴러요. 나는 사랑과 아름다움과 행동 사이에서 잘 헤맵니다. 사랑을 느끼면 꼭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봐요. 꼭 뭘 하고 싶어져야 사랑이라고 생각하든가요. 그래서 어려워요. 걱정 마세요, 연습하는 중이에요.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 안 고통스럽고 안 슬프고 어떡하지, 라는 목소리에 그냥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럼 항상 두 손이 꼭 모아져요.

며칠 전에는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다 없어졌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6개월 뒤에만 다시 보자고요. 몇 사람들한테서 축하를 받았습니다. 여전히 몸을 조심히 움직입니다. 가끔 아직 통증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플 때 입었던 옷들에서는 아픈 냄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쨍한 편두통이나 불쾌하게 흐리고 밝은 날씨의 냄새 같은 것들요.

아플 때 향수를 뿌리고 손목을 문지르면 유난히 액체로 느껴져요. 아픈 몸에 향수를 바른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일기예요. 정말로요. 아무 기대도 하지 마세요.

예전에 영시를 좋아하던 사람을 알았는데요. 한국어로 쓰인 시는 절대 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내가 영시를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닮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우연이 많아요. 그리고 어쩐지 우연은 늘 내 걸음을 뒤집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동전의 앞 뒷면보다는 모자이크 조각처럼요. 그래서 좋아요. 형형색색의 놀이는 어느 쪽이든 웃게 돼요. 파리에서는 생 샤펠 성당을 갔었거든요. 푸른 천장 위의 무수한 별을 보겠다고 간 건데 스테인드글라스에 넋을 놓고 고개가 뻐근해졌고요.

헬레나 본햄 카터는 여러 편의 시를 읽어두었습니다. 몇 번이고 틀어서 듣고 있어요. 다른 시보다 메리 올리버의 'Wild Geese' 를요. Tell me about despair, Yours, and I will tell you mine. 그 문장 때문에 그 시를 고릅니다. 우린 다 그렇잖아요.

원하신다면 orion sun 의 mango 를 들어보세요. 깨끗하고 건강하고 싶을 때 듣는 노래예요. 아주 짧지만. 전 오늘도 들었어요. 며칠 전부터, 버스 안에서, 일기를 쓰면서.

이건 일기니까요. 그러니까 더 써둘지도 몰라요. 참을성을 잃는 것처럼요. 선풍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돌리는 일처럼요. 가계부를 쓰는 것처럼요. 쓰는 걸 잊어버리는 일처럼요. 굳이 높은 나무 계단을 올라가는 일처럼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입에 물고 눈을 감고 어제만큼은 선명하지 않은 날의 냄새를 맡는 일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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