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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Oct 10. 2020

.덮개.

.우물.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삼일 동안 고인과 당신들을 위하여 많은 이들이 함께 울며, 슬퍼하며 장례식장을 오갔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상복을 벗고 눈물은 거두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벌써요?

한참은 더 토해내야 할 울음이 있는데요. 채워지지 않는 상실은 어쩌죠.

죽음을 본 나는 어디, 기억을 지우는데라도 있을까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토해내야 할 울음과 상실과 지울 수 없다면 가지고 갈 기억과 함께 말이에요.


여기에 오기 전 다짐하던 말이 있었어요.

당신이 계속 이야기하는 그 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근데 이 말 말이에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말하는 지랄 같은 소리예요 그거.


처리


울고 웃던 비극과 블랙 코미디를 오가던 장례는 끝이 났다.

상복을 벗어 봉투에 담고, 유축기를 비닐에 싸 박스에 넣는다.

집에 가지고 갈 마음은 들지 않아, 남편에게 처.리.를 부탁한다.


토해내야 할 울음과 상실과, 기억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우리는 돌아왔다. 죽음은 철저히 개개의 것이라고 한 소설에 나오는 글처럼, 우리는 개개의 캐리어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집에 왔다. 

누구의 짐을 대신 들어주지도 나의 짐을 누군가에게 맡기지도 않는다. 조용히 짊어지고 조금씩 가벼워 지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등은 굽어지고 고개는 땅에 박은 채.


잿빛과 빛

장례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날부터 세상은 문득문득 잿빛이었다. 유리에 묻은 자국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문질러 봤다. 여전히 잿빛이다.

사람의 마음에 어둠이 너무 크게 자리를 잡으면, 눈으로 보이는 세상도 어두워지는구나.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으로 놀라거나 두려운 마음은 사라진다. 하루에 몇 번, 길어도 30분을 넘기진 않는다. 

다행히 아이는 여전히 온갖 색깔을 가지고, 날 바쁘게 하고 웃게 하고 잠을 못 자 지치게도 만든다. 

잿빛, 너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 작은 아이는 생명이고 날 살아가게 하는 현실이다. 아무리 어둠이 나를 좀먹어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가끔 잿빛일지라도, 온갖 색깔의 저 아이가 있으니 힘없이 어둠에게 먹히는 일은 없을 거다.


잿빛의 세상에도 다행히 빛은 있다. 거실에 앉아 한낮부터 들어오는 빛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잿빛일 때 보는 빛은 더 환하다. 빛만은 어찌할 수 없는지 아무리 어둡게 세상을 보게 하려 해도, 빛은 여전히 밝아 눈이 시리다.

흐르는 시간도 존재한다. 빛을 보는 것처럼 시간을 본다.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분명히 보게 된다.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긴긴 날들을 견딜 수 없기에.


누구에게나 있는 빛과 시간이 나에게도 똑같이 주어졌다. 주어진 그 빛을 받고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면 된다.

살 수 있다.




열흘 넘게 보이던 잿빛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덮고 있던 어둠이 사라진 걸까? 빛이 내 어둠을 다 먹어버렸나.

여직 등은 펴질 줄 모르고, 고개는 더 깊숙이 땅에 처박혀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내 안의 가벼움은 어쩐 일인가.

날 가볍게 만든 만큼의 무게는 어디로 갔을까.


우물


묻었구나. 항상 묻곤 하던 곳에. 그래서 가벼워 진거였어.


빛이 비치고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눈여겨본다 해도, 네 짐은 가벼워질 줄을 몰라.

넌 괜찮은 척 연기를 잘해서, 이제 아무도 네 짐을 건드리려 하지도 않고. 

그게 모두를 위해서도 편한 일이긴 하겠지. 슬픔을 드러내는건, 그리고 그걸 봐주는 건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알잖아. 건드려 밖으로 토해내줘야 한다는 걸. 하기 싫어도 꺼내 봐줘야 한다는 거.

그런데 넌 도저히 그걸 밖으로 토해내질 못해. 자꾸 삼켜.

나도 꺼낼 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또 그곳에 갔어. 

묻고. 덮개로 덮었어.


아... 이번에는 정말 무거운 걸 묻었는데 괜찮을까.



많은 날들이 지나간다. 묻은채로. 많은 곳들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묻은채로.


왜인지 전보다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나 봐. 생이 날 이끄는 대로 끌려가긴 하는데, 왜 이렇게 버거워?


빛을 일부러 찾아보지 않게 됐고 어두운 곳에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잦아졌어.

흐르는 시간을 눈여겨보는 것도 이제 지겨워. 

봄이 오는 것이 싫어졌거든. 아빠가 죽은 6월이 가까워지는 봄. 

여기 사람들은 봄만 되면 집을 고쳐.

귀는 아침부터 부지런한 소리들에 예민해지고, 눈은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할 때마다 고역이야.

봄 냄새. 코를 틀어막고 싶어. 나무가 살아나는 냄새, 겨우내 땅에 박혀 있던 것들이 요란하게도 나오며 나는 흙냄새. 이게 지나면 아빠가 돌아가신 날들이 다가와, 지금부터 난 견딜 수가 없어.


뚝.

뚝.

뚝 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놀라는 척해도 알고 있다. 어디서 들리는지.

들리는 소리가 어디인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데

소리는 집요히, 싫다는 나를 데리고 내려간다.


우물이 보인다.

내 안의 곪고 문드러진 것들을 묻어 둔 우물.

여기까지 내려와 보는 건 처음이야. 그런데 덮개는 어디로 갔어? 

잘 덮어뒀어야지. 덮개를 찾는다. 서둘러 묻어야 할 것 같아.


덮개는 없어.

이제 여기 우물을 잘 들여다봐야 해.






https://unsplash.com/photos/jNSJE8dMr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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