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처리
잿빛과 빛
장례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날부터 세상은 문득문득 잿빛이었다. 유리에 묻은 자국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문질러 봤다. 여전히 잿빛이다.
살 수 있다.
열흘 넘게 보이던 잿빛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덮고 있던 어둠이 사라진 걸까? 빛이 내 어둠을 다 먹어버렸나.
여직 등은 펴질 줄 모르고, 고개는 더 깊숙이 땅에 처박혀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내 안의 가벼움은 어쩐 일인가.
날 가볍게 만든 만큼의 무게는 어디로 갔을까.
우물
묻었구나. 항상 묻곤 하던 곳에. 그래서 가벼워 진거였어.
빛이 비치고 아무리 시간의 흐름을 눈여겨본다 해도, 네 짐은 가벼워질 줄을 몰라.
넌 괜찮은 척 연기를 잘해서, 이제 아무도 네 짐을 건드리려 하지도 않고.
그게 모두를 위해서도 편한 일이긴 하겠지. 슬픔을 드러내는건, 그리고 그걸 봐주는 건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알잖아. 건드려 밖으로 토해내줘야 한다는 걸. 하기 싫어도 꺼내 봐줘야 한다는 거.
그런데 넌 도저히 그걸 밖으로 토해내질 못해. 자꾸 삼켜.
나도 꺼낼 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또 그곳에 갔어.
묻고. 덮개로 덮었어.
아... 이번에는 정말 무거운 걸 묻었는데 괜찮을까.
많은 날들이 지나간다. 묻은채로. 많은 곳들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묻은채로.
왜인지 전보다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나 봐. 생이 날 이끄는 대로 끌려가긴 하는데, 왜 이렇게 버거워?
빛을 일부러 찾아보지 않게 됐고 어두운 곳에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잦아졌어.
흐르는 시간을 눈여겨보는 것도 이제 지겨워.
봄이 오는 것이 싫어졌거든. 아빠가 죽은 6월이 가까워지는 봄.
여기 사람들은 봄만 되면 집을 고쳐.
귀는 아침부터 부지런한 소리들에 예민해지고, 눈은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할 때마다 고역이야.
봄 냄새. 코를 틀어막고 싶어. 나무가 살아나는 냄새, 겨우내 땅에 박혀 있던 것들이 요란하게도 나오며 나는 흙냄새. 이게 지나면 아빠가 돌아가신 날들이 다가와, 지금부터 난 견딜 수가 없어.
뚝.
뚝.
뚝 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놀라는 척해도 알고 있다. 어디서 들리는지.
들리는 소리가 어디인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데
소리는 집요히, 싫다는 나를 데리고 내려간다.
우물이 보인다.
내 안의 곪고 문드러진 것들을 묻어 둔 우물.
여기까지 내려와 보는 건 처음이야. 그런데 덮개는 어디로 갔어?
잘 덮어뒀어야지. 덮개를 찾는다. 서둘러 묻어야 할 것 같아.
덮개는 없어.
이제 여기 우물을 잘 들여다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