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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Oct 24. 2020

.공황.

.우물.

그날 밤


영화에서 보면 쉬이이익하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효과음이 들리면서 주인공 눈이 확 떠지잖아요.

눈에는 공포인지 두려움인지, 화면 가득 놀란 눈을 해서는.

그날 새벽, 저도 그렇게 눈이 떠졌어요. 영화 속 사람처럼. 그러고 있었어요. 뚫어지게 천장만 보면서.

그게 처음이었어요 선생님. 공황이 온 게.


악몽을 꾼 건지, 가위에 눌리고 있는 중인지 알 수 없다. 겪어보지 못한 공포와 두려움이다.

그것들이 어딘가를 단단히 막고 있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노랗다. 자는 동안 누가 크래용으로 얼굴에 색칠을 한 듯 빼곡히 노랗다.

노란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저리듯 아파오기 시작한다.

'심장마비구나. 지금 병원에 가지 않으면 죽는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의 집착은 생각보다 강해,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먼저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운다. 심장마비가 온 것 같으니 병원에 가야겠다고.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있다.


너 밤에 라면 먹고 잤잖아. 체한 거야. 체한 거. 누가 밤에 라면을 먹어.
밤에 라면 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오빠만 안 먹어.


말하고는 웃는다. 죽음이 직전에 와 있는 것 같아도 웃긴 소리에는 웃음이 난다.

차분히, 다시 남편에게 말한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으며 심장이 많이 아프니, 어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는 나를 보곤 뭔가 심상치는 않다 싶은지 옆 방으로 가 아이들을 깨운다.

엄마가 많이 아파, 빨리 옷을 입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자다가 깬 아이들도 엄마 아빠의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운에 서둘러 옷을 입는다.


공황장애


그 후의 이야기는 많이도 들어 봤을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다.

몇 차례 병원을 오간다. 비슷한 검사들을 한다. 아무 이상은 없다. 그런데도 죽을 것만 같은 밤은 이어진다.

공황장애라는 정신과 질환을 가지게 된다.

내가 공황장애라니. 믿을 수 없어요. 말도 안돼. 내가 왜 그런 정신병이 있어요?

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공황장애. 이경규와 김구라가 가지고 있다는.

의사의 입에서 공황장애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경규와 김구라가 생각났다.  

그들이 증상과 발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가끔 내가 겪는 일과 비슷해, 지나치며 볼 순 없었다.

그런데 또 남은 남이라.  나한테 올 줄은 모르고, 참 힘들겠구나 했는데.

내 일이 되었고, 내 일이 되고 나니, 얼마나 이 병이 무서운 지도 알게 되었다.


발작이 오는 날이면 죽진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심장을 부여잡는다. 의사들이 말하는 똑같은 말.

공황장애로 죽지는 않으니 걱정 말라고.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이걸로 난 죽지 않는다.

그러다...

이건 진짜. 오늘은 진짜. 정말 죽는 거구나 할 때.

밀려오는 공포를 누.가 알.까?


인정은 하는데 의문은 들어요. 꽤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술 먹고 날 찾는 아빠는 이제 옛날 사람이 됐고,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날 그 밤도 이제 잊은 지 오래인데.

가끔 생각하면 누가 죽은 게 그리 큰 일이라고. 죽음을 본 게 뭐 나뿐이냐고. 호들갑스러웠단 생각도 들어요.


시간도 꽤 흘렀고, 살던 곳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지 7년이 다 되어가요.

이민생활 적응하느라 많은 시간을 바쁘게 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둘째도 이제 학교에 들어가고요.


얼마 전에 어깨가 많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샀어요. 살까 좀 망설였는데 꼭 입고 싶더라고요.

남편이 예쁘다고 해서 샀어요. 그 옷을 입고, 남편이랑 애들이랑 시내에 가서 여기저기 다니며 맛있는 것도 먹고, 저녁에 잠깐 뮤지엄에도 갔어요. 해가 지고 뮤지엄에 가니 좋더라고요. 여기저기서 조용히 웅웅 거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어디서 연주를 하는지, 그 속에 피아노랑 바이올린이 가늘게 들려요. 사방은 노란빛으로 흐릿한데 얼굴을 돌리면 그림이 있고요. 조금 더 머물고 싶었는데 애들이 너무 지루하다고 해서 빨리 나온 게 아쉽네요.


그리고 며칠 후에, 처음, 패닉이 온 거예요. 지금 그 날을 이야기하는 건 좋아서만은 아니에요.

억울한 거죠.

무난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공황장애라니. 왜 그 좋은 날을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며 떠올리게 만드냐고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위안을 받으며 살았는데. 뭘 얼마나 더 세월을 견뎌야 좋아질 수 있는 건지. 그동안 견딘 게 억울하단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시간 자체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속으면 안 돼요. 시간의 흐름에 내 아픔과 슬픔이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 오랜 세월을 견디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많은 것들을 누르고, 눈을 감고 귀를 막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어야, 시간이 약이 되는 거예요. 시간 밖에서 살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시간에 빌붙어 말이죠.

그렇게 살고 있는데 공황장애가 왔어요. 시간이 정말 약이구나, 괜찮아지는구나 생각할 때쯤.


그래서 난 지금 매우 억울하고,  의아하기까지 해요.


자기 연민


우울이 죽음과 어둠을 곁에 두고 사는 것 같았다면

공황은 죽음과 어둠에서 벗어나,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게 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우울을 달래던 많은 밤들은 지나갔다.

우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거라고 여기며, 언제나 비밀스럽게 우울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다. 혹시 누가 날 위로하려 들까, 불쌍하고 가련하게 날 보지는 않나 싶어 사람들을 살피다, 내가 먼저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았다.


공황은 그런 우울을 답답하다 밀어내고 소란스레 와 야단법석을 떨고 가버린다.

같이 요란한 사람이 되어간다. 말이 많아진다. 사람들에게 우울과 발작과 어두운 날들을 쉼 없이 이야기한다.

공황장애를 앓는 것이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표식인 것처럼 쉴 새 없이 날 봐달라 말을 하며, 그들의 위로를 구하고 공감을 얻으려 한다.

이전에는 마음을 닫으려 사람들을 살폈지만 지금은 어디 들어갈 자리를 만들려 사람들을 살핀다.


후회를 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우울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받는 위로가 충분치 않다는 불만족에서 오는 후회였다.


그들의 눈빛이 몸짓이, 말 하나하나가 만족스럽지 않다.

날 더 이해하는 눈빛으로 봐줘야지. 

충분히 더 공감을 표현하는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냐?


다시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심통난 어린아이처럼 다짐을 한다.


각성


다짐을 해도 여전히.. 요란스럽게 침을 튀기며, 살까지 붙여 말을 하는 나를 보고는 놀라 입을 다물었어요.

왜 사람들의 위로를 받을 수 없는지, 왜 만족할 수 없는지 그 순간, 정신이 차려지고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잘못이 없어요. 그러니 찾을 수 없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오히려 나를 보며 정말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요.

아무리 큰 위로와 공감을 받아도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스스로를 너무 불쌍히 여겨, 세상 누구도 나보다 날, 불쌍히 여길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거예요


너희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 내 것보다 클까.

내가 그동안 견뎠던 시간을, 고작 그 정도의 상처만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알 수나 있을까.

위로를 구하면서도 한없이 그들을 비웃으며, 날 한 번 위로해 보라고.

나보다 적은 짐을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날 위해 더 크게 울어야 한다고.

커다란 자기 연민으로 날 둘러, 그 속에 들어앉아, 밖의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막아버린 거예요.

한없이 불쌍한 나, 한없이 위로받아야 할 나.

그날, 그런 모습으로 위로를 받겠다 작정을 하고, 거기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놀라.

너무 놀라 입을 다문 거예요.


일단 정신은 차렸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계속 이 상태로 놀라 있으면 발작이 올 것 같아 불안은 오는데,  주춤하면 또 잊어버리고 다시 자기 연민으로 빠질 거 같고.

습관적으로 우물을 다시 찾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남은 생을 다시 그짓을 하며 살 순 없다 했어요. 다시 우물에 내려가고 싶지 않아요. 거긴 너무 어둡고 올라오는 것도 힘이 들어요.

내가 날. 절대. 다시는. 그곳에 보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말리고 있었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은 조금 더 밝은 곳으로  나가야겠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밝은 게 싫어진다. 눈도 찌푸려지고 내가 너무 드러나 부끄럽다.

어둠 속에 오래도록 날 묻어두었으니 빛에 날 드러내, 똑똑히 보아야 겠다.

그게, 내가 정신을 차린 후 처음 한 일이었다.

날 드러내 똑.똑.히.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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