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상담을 시작한다.
뻔한 물음을 하고
뻔한 대답이 오고 간다. 점점 더 뻔할 것이 보여, 뻔한 이야기나 하고, 접어야겠다.
멍석이 깔아졌다 생각하자.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도 되는, 깔아놓은 자리이니 실컷 말이나 하고 가야지.
나야 뭐, 할 말 많은 사람이니까. 들어나 보세요. 작정을 하니 이야기꾼마냥 말이 술술이다.
잠깐만요.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그런...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어때요? 선생님이 묻는다.
이야기꾼에겐, 누구도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는다. 얘기 잘 들었다 하고 가면 그만이고, 이야기꾼도 잘 풀어냈다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듣다 가실 일이지 갑자기 내 기분을 묻는다.
듣고 싶으시다면 말해야죠 하고 말하려는데, 할 수가 없다.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방에 들어와 몇십 분이 넘게 떠들은 말들 속에 내 감정이 어떤지는 찾아지지 않는다. 선생님의 단순한 그 질문이 날 막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 한다. 이상한 사람이 훼방을 놓아 말할 맛이 다 떨어졌다며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멍석이고 뭐고, 나도 저 방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가고는 싶은데 안달이나 묻는다. 넌 왜 네 감정을, 기분을 말하지 못하느냐고.
쉴 새 없이 떠들 땐 언제고, 그거 하나 말을 못 해.
뻔한 물음을 하고 뻔한 대답을 하다 뻔한 길로 가겠지 했는데, 아예 길이 막혀버렸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가볍게. 말씀도 정말 재미있게 잘하시네요.
그런데 자기 얘기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지금 말하고 있는 기분이,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
집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방문만 보고 있는데 , 어느새 묻고 있다. 간절히, 알고 싶은 마음이 들어.
뭐가 이렇게 어렵죠? 지금 기분을, 감정을 말하는 게. 한 번도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아니면 정말 지금껐, 한 번도 내 기분이나 감정을 헤아려 보거나 말한 적이 없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근데...그게 문제가 되나요?
감정불구라는 말이 있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분명 온몸과 마음에 들끓는 감.정.이라는 것은 있다.
예민도 하여 다른 이의 기분과 감정까지 알아차려 피곤할 정도인데.
그런데 그날의 나처럼, 감정을 말하지는 못한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는 똑똑하다 철떡 같이 믿던 어느 날, 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온 아이를 본 엄마처럼 놀라울 정도로 실망스럽다.
누구보다 내가 날 잘 알아, 스스로 치유해, 일어날 수 있다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우물을 파고 우울을 묻고, 덮개를 덮는다.
어느 날 사라진 덮개를 찾는 당황한 날 보며, 괜찮다 말하고는
용감한 척, 들춰진 우물을 본다. 우울이 가득이다.
덮개는 찾을 수 없고 우물은 드러났으니 봐줄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내 몸과 마음을 내어줄 수밖에. 달래다 보면 우는 것도 없어지고, 날 보러 오는 일도 그만하겠지.
이러한 나날들을 지치지도 않고 부지런히도 하고 살았다.
그러니까 공황이 온 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나와 버린 거네요. 그만 할 때가 되었다고 경고를 해도 못 알아먹는 나를 보곤, 안 되겠다 하고 튀어나온 거죠. 다 찬 거예요. 힘을 다 써버렸거든요.
뭐든지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 건 위험해요. 꾀어내, 괜찮아질 수 있다고 끌고 가서는, 나조차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빽빽한 어둠에 데려가, 이젠 정말 나도 내가 보이지 않아요. 선생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건 아니에요.
뱉어내고 토해내 거둬내면, 빛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없는 건 아니다.
어둠 속에 들어가 숨어 버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스며든 어둠에 갇혀 버렸으니,
빽빽한 어둠을 걷어내고 찾아내자.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도 생을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으니 방.법.을 바.꾸.면. 될 일이다.
꺼내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묻어놓은 마음을 지난날처럼 우물 보러 가듯, 아래로 내려가 보지 않고,
위로, 위로 끌고 올라가 뱉어내야 한다. 토해내야 한다.
드러난 것에 놀라 잠깐 멈춘다. 이런 게 있었구나 다시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버려 버린다.
그러다 힘이 들면 쉰다. 울기도 한다. 아주 크게 울기도 한다.
빽빽한 어둠이 조금은 거둬진 것 같다.
남편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마음과 감정을 조금씩 털어 놓는다.
이야기만 던져 놓고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이 들키면,
사람들에게 짐이 될까 염려가 될까 연민이 될까, 겁부터 먹던 많은 날들처럼 도망가지 않으려, 디딘 마음에 힘을 준다.
알아주길 원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들은 몰랐다고 말하며 미안하다 한다. 왜 그랬냐고 화를 내기도 하고, 가엾다 울기도 한다.
나도, 그러지 말라며 미안하다 말하고 그게 아니라고 화를 내기도 하고, 그러다 울기도 한다.
거둬져... 빈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짐이 될 수도, 염려가 될 수도, 연민이 될 수도 있다.
그들도 말한다. 네가 짐이 될 수도 염려가 될 수도, 가여워 연민이 될 수도 있다고.
솔직한 네 감정을 드러냈으니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냐고.
그런데 말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몰랐다면 넌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이 됐을텐데.
그러니 짐도 염려도 연민도, 우리가 널 사랑하는 마음보다 크지는 않다고.
사랑이,
모든 짐을,
염려를
연민을, 덮는다.
빈 곳에 빛이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