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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Jan 29. 2024

순수를 찾아서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6


황혼이 세상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시간이다. 분홍 장미, 노란 카네이션, 흰색 백합들이 가득한 정원에서 금발 소녀 둘이 등불을 밝히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들보다 키가 더 큰 흰 백합은 조명등처럼 소녀들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듯하다. 백합의 꽃말이 순수라고 했던가. 흰옷을 입은 소녀들 역시 순수한 백합 송이 같다.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작품이다. 그는 미국 출신 화가로 특히 상류사회 인물의 초상화를 잘 그렸다. 새로운 기법과 색을 사용한 그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끌었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초상화를 의뢰했을 정도였다.

사전트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이 뛰어났다. 그와 함께 그림을 배웠던 동료들은 선생님보다 사전트가 그림을 더 잘 그렸다고 회고했다.


이 작품은 영국의 한 정원이 배경이며, 두 소녀는 11살, 7살로 작가의 친구 딸들이다. 저녁 빛을 포착하고 싶었던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저녁마다 그가 원하는 빛이 나타났을 때 몇 분씩만 그림을 그렸으며, 완성까지 몇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국에 처음 전시하여 큰 호평을 받았고, 고향인 미국까지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살다 보니 얼굴 여기저기에 세월의 흔적이 발견되고, 몸매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외모만이 아니라 쓰는 말, 행동, 사고방식도 변했다. 지나온 시간이 날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구나 하고 이런 변화를 당연하게 여겼다.      


어릴 때는 모르는 것도 많고, 세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든 일에 미숙하기에 손해도 많이 보고 불운한 일에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차츰 지식을 쌓고, 침착함과 신중함을 기르고, 경험을 축적한다. 카메라가 렌즈를 통해 사물의 초점을 맞추듯 그 경험, 지식, 신중함 같은 것을 렌즈로 삼아 세상을 또렷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욕심과 불안이 자꾸 그 초점을 흐리는 것 같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잘 살고 싶고,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약자가 되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 쌓은 것들을 잃고 싶지도 않다. 거짓, 위선, 무례함, 치사함 등 거칠고 어두운 면을 경험하다 보니 나 역시 더 강해지고 거칠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순수함은 나약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문득 세월에 치이고, 인생의 무게에 닳은 나를 돌아보면 씁쓸하다.      


가끔 평생을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곱고 점잖은 어르신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누구보다 많은 인생의 고비를 넘고,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고도 순수함과 따뜻함을 유지하고 계셨다. 그런 분을 보면 진정한 고수라는 느낌이 든다.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면서 본연의 고운 마음은 거친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대로만 유지한다면 나이가 들면 어리숙하고 미숙해진다. 반면 거칠고 힘든 길을 다 거치고도 본연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면 한층 더 원숙해진다.      


그러려면 맑고 순수했던 나를 자꾸 꺼내어 보며, 탁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게. 본래의 고운 모습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밝음 속에서만 사는 꽃은 없다. 수많은 밤을 지나도 아침이 오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꽃이 핀다. 어지럽게 부는 바람에 세상을 이리저리 쓸려 다녀도 순수의 씨앗을 지키는 것,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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