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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Apr 27. 2016

내일 점심 회사 근처로 갈게

나무 도마에 기름칠- 건조해진 관계 되살리기

요리 잘 하는 엄마 덕분에 평생 맛 좋은 한식을 먹고 자랐음에도 나는 양식을 선호한다. 스읍 들이키면 목구멍으로 홀랑 넘어가버리는 국물보다는 진득하게 끓여 입에 오래 머무르는 수프가 좋고, 데친 후 갖은 양념에 무친 나물보다 찬물에 씻어 내어 사각사각 씹히는 샐러드가 좋다. 간이 푹 배어 부드럽게 조리된 갈비찜보다 고소하고 텁텁한 육즙이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는 스테이크가 좋다.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가서 한식을 가득 먹는 것은 별미지만, 며칠 지나면 보울 한 가득 샐러드를 퍼먹고 싶어 지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다 보니 유럽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거리에 퍼지는 아침의 빵 냄새에 설레고, 어느 가게에 들어가도 중간 이상의 맛을 내는 요리들에 물 만난 생선처럼 신이 난다. 특히 시장에 들르면 갖은 신선 식품들이 즐비하니,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이 재료들을 트럭으로 실어다 나르고 싶다.


2011년 9월, 프랑스 니스의 시장


유럽에서 가장 신나는 곳은 지중해를 끼고 있는 도시들이다. 공기 좋고 물 좋고 햇살이 좋은 이 곳들은 풍성한 해산물과 신선한 올리브, 당도 높은 과일이 자라나니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참기름보다 올리브유를 좋아하고, 생 올리브는 더 좋아하는데 한국에서야 병조림 혹은 통조림으로 만날 수밖에 없어 늘 아쉽다. 이 도시들의 시장에 가면 커다란 나무통 한 가득 초록 올리브와 깜장 올리브를 씨를 뺀 것, 씨 째 가공한 것, 씨를 빼고 사이에 다른 무언가를 넣은 것, 과일을 곁들인 것, 시고 짠 것 등 가게 별로 열 개 내외의 통에 담겨 우리의 반찬가게처럼 판다. 올리브가 많은 만큼 올리브 나무도 흔하다. 동남아 아열대 지방을 돌아볼 때 커다랗고 무성한 나뭇잎이 이국적이듯, 이곳들에서는 정원이나 길 가에 심긴 올리브나무가 눈에 띈다. 꼭 어느 시골의 농장에 가지 않아도 올리브나무를 볼 수 있다. 윤기가 돌지만 흰색 필터를 낀 듯한 흐린 초록의 이파리들이 푸르다기 보다는 에메랄드빛에 가까운 바다와 잘 어울린다.


올리브를 한참 시식하다 나무 도마를 파는 옆 가게로 이동했다. 옆 집 탓인지 은은한 올리브 향이 풍겨왔다. 결이 살아 있는 도마들을 들어 올려 눈높이에 두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향이 좀 더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했다. 주인장이 슬쩍 올리브 나무라고 전한다. 그러고 보니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낮은 채도의 부드러운 광택이 도마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올리브 나무에서 올리브 향이 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신기했다. 햇살이 좋은 날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치즈 몇 가지와 크래커를 내면 지중해의 느낌을 고스란히 실어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리브 향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공기 반 소리 반이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의 느낌을 충만히 살려 ‘실보플레(S'il vous plaît / 영어의 please)’. 주인장의 꼼꼼한 포장 덕분에 이 도마, 어디 한 군데 찍히지 않고 한국까지 먼 길 함께 와서는 5년째 동거 중이다.


캐쥬얼한 음식들을 나무 도마 위에 올려 내면 근사한 분위기가 난다


이미 머릿속에 그리던 캐주얼한 와인파티의 플레이팅으로 이 녀석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그릇보다 훨씬 흠집이 나기 쉬우니 이래 저래 아껴 쓴다는 핑계로, 혹은 자주 쓸 일이 없다는 핑계로 손이 닿지 않은 찬장 맨 위의 구석에 모셔지다 보니 쓴다 쓴다 하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 까다. 스테이크는 나무 도마 위에서 가장 잘 썰리지만, 그렇게 쓰기엔 완연해질 칼자국이 싫어서 쓰지 않는다. 누구를 주던지, 플리마켓에 내놓겠다 생각하다가도 언젠가는 쓰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관만 한다. 써야지, 써야지. 보이는 때마다 왠지 응달에 쳐 박아 둔 것 같아 아쉬우면서도 막상 쓰려고 하면 쉬이 꺼내지지 않는다. 최근 6개월 간은 정말 한 번을 내어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꺼내 보니 표면이 거친 것이 사람으로 치면 건조한 피부 같아 보여 인터넷에 살펴보니, 나무 도마는 주기적으로 기름을 먹여주면 오랫동안 쓸 수 있단다. 자주 썼으면 쉽게 눈에 보였을 텐데, 이제야 발견해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기름칠을 했다. 올리브유로 올리브 나무 도마를 관리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피부가 건조한 겨울에 크림을 펴 바르면 피부가 유분을 쫙 쫙 흡수하듯, 도마도 올리브유를 주는 족족 잘도 빨아들였다.


언제 한 번 보자.


한 때의 회사 친구, 운동하다 만난 친구, 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 등 성인이 되고 나서는 뭔가 애매한 친구들이 생긴다. 통화 버튼 한 번이면 되는 것이니 언젠가는 만나 지겠지 하며 미뤄오는 만남들이 많아졌다. 막상 만나면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아지면서도, 전화나 메신저로 안부를물을까 하면 잘 지내느냐는 어색한 인사가 부끄럽다. 오랜 친구들이야 뜬금없이 뭐하느냐 물어도 밥 먹는다, 청소한다 소소한 답들이 돌아와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그러나 그냥 친구가 아니라 과거 인연에 대한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 이 친구들과는 오랜만에 용건 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분명 한 때는 매일의 일상을 같이 하니, 어제 밤 보았던 드라마, 아침의 커피, 새로 발견한 맛집, 새로 산 옷, 주말의 나들이 등 별 것 아닌 것들을 공유했던 사이지만 그것이 잠시 끊기면 금세 멀어지기 쉬운 친분이다. 


이 어색함을 애초에 좀 더 감소했더라면 지난 인연들을 이렇게 쉬이 보내버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고, 연락하자 해 놓고서는 연락하지 못한 마음의 짐도 항상 있다. 원수를 진 것도 아니면서 첫인사 몇 마디의 어색함이 왜 그리 싫은 건지 모르겠다. 몇 해 전 공항에서 우연히 매일 함께 일했던 상사와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데, 옛날 일들이 떠올라 한참을 떠들었다. 너무 반갑지만 서로 비행기 시간도 있고 하니 ‘한 번 찾아 갈게요. 밥 먹어요.’ 해 놓고서도 돌아오고 나니 출장은 잘 다녀오셨느냐는 말 한 마디가 꺼내지 질 않았다. 찬장 저 위에 놓인 올리브나무 도마처럼 많은 추억을 회상하게 하면서도 자주 꺼내보지는 않는, 건조해 거칠어진 인연들이다.


묵혀뒀던 도마의 표면은 건조한 나머지 하얗게 표면이 일어났다
기름을 먹여 이틀 정도 건조하면 본래의 윤기를 되찾는다.


올리브유를 먹여두니 도마는 처음 같은 광택을 되찾았다. 자연 소재의 그릇은 이렇게 회복이 된다는 점이 참 좋다. 공장이 아닌, 자연에서 태어난 녀석들만이 가지는 생명의 특권이랄까. 두 번의 기회가 없이 깨지면 생명을 다하는 그릇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회사를 나와 무소속으로 지내보니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을 알 것 같다. 이별 후의 여인처럼 걷다가 먹다가 그냥 지나 다예전 생각이 훅 밀려오는데, 그 날들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 한 번 만날 예정으로 곁에 없다. 사람도 생명을 가졌으니, 그들 간의 관계도 언제든지 살아날 수 있겠지. 도마가 모두 말라버리기 전에 마음먹고 아쉬운 사람들에 안부를 묻고 구체적인 약속을 잡아야겠다. 정말 만나자. 내일 점심 회사 근처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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