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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Mar 23. 2016

꿈과 열정이 없어도 충분하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릇 나름의 쓰임

내겐 분기별로 한 번씩, 일 년에 네 번은 꼭 하는 일이 있다. 컴퓨터 파일 정리, 개인 신상정보 정리, 핸드폰 사진 정리, 연락처 정리 등 무형의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널브러진 집안 꼴을 못 보는 성격은 가상세계에 그대로 적용돼, 어딘가 내 정보가 새어나가진 않는, 혹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정보가 기기를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한다. 연예인도 아닌 것을 참 별나게 군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가상의 먼지가 뒤덮어가는 기분은 견딜 수 없다. 일단 연락처의 목록에서 예의상 받았던 번호들을 삭제한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그래서 늘 100명을 넘지 않는다. 국내/외 검색 사이트에 나의 신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검색해보고,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 글들을 찾아 삭제하거나 공개범위를 수정하곤 한다. 보통은 SNS 계정에 실수로 전체 공개해 둔 사진들이 포착돼 수정하는 경우가 많고, 대학생 때는 학과 게시판에 누군가 조별 연락처를 공개해두었던 것을 삭제 요청하기도 했다. 내 것이 끝나면 간략히 생각나는 지인들의 정보도 검색해보고 쉽게 걸리는 것들은 알려주기도 했다.



정리 활동 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국민 메신저 K사다. 처음부터 삭제가 되면 좋을 것을, 굳이 차단을 했다가 차단을 다시 해제하고 친구 목록에 다시 추가하지 않겠다는데 동의하면서 삭제가 된다. ‘삭제’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아 모르다가 며칠 전에서야 삭제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기능을 알고서 정리를 하고 나니 말끔한 기분이 들지만, 그간 숨김/차단 친구 목록의 리스트를 보면 찜찜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숨김 친구 리스트 중에는 꽤 유혹적인 프로필 사진이 등장하니 옛 연인(들)의 최근 모습도 그중 하나다. 이제는 굳이 큰 의미가 없는 사진들이지만 괜히 한 번 사진을 확대시켜보는 유혹은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전의 연애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아쉽다. 좋아 죽는 사이로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고, 팔짱 끼고 돌아다니느라 수업도 좀 빼먹고 하는 연애를 좀 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생이던 내내 그저 친구들과의 카페 놀이, 방학이면 집순이, 시험공부와 드라마로 꽉 찬 일상을 보냈고, 연애는 남일이었다. 캠퍼스의 커플들을 보면 지금도 부럽다. 늦바람이 무섭다지만 내 경우엔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충분히 사랑했고 지금도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으로 감사하지만 무언가 간절하거나 애타거나 드라마와 영화 속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편한 사이로 집착이 없고 다툼이 없어 좋았다. 그것이 주변에서 보면서로 좋아는 하는지, 손은 잡고 다니는지 의문을 가져왔고 한 번씩 나 스스로도 의문이 드는 때가 있었다.


미지근함과의 다툼


연애뿐만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꽤 미지근했다. 미지근함과의 다툼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젊은이의 뜨거운 혈기, 꿈을 향한 열정 등이 강조되며 노력하면 된다,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 하니,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간절한 소망이란 것이 없는 나의 모습이 늘 불만이었다. 꿈을 잃지 말라는 것의 전제는 꿈이 있다는 것인데, 점심에 뭐 먹지 밖엔 꿈이라 할 것은 없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물론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수사물을 보면 형사가, 예술영화를 보면 배우나 감독이 되고 싶은 가벼운 흥미에 불과했으니, 적어 넣은 장래희망에 떳떳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겉으로는 간절한 듯 잘 포장할 수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진 아닌데’ 하는 생각에 갈등이 되고, 거짓말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고, 왜 나에겐 간절함이 없는가 하는 내면의 갈등이 생겼다.



그냥 어쩌다 보니 흘러 들어간 직장에서 갈등은 더 커졌다. 그저 주어진 일이니 소가 밭을 갈듯 하는 나의 모습과, 정말 흥미가 있어 업을 택한 사람들의 모습은 다르게 느껴졌다. 일에 흥미가 없으니 잘 해도 그리 기쁘지만은 않고, 못하면 미지근한 삶의 온도에 뒤떨어졌다는 패배감이 더해져 절망적이었다. 잘 해야 본전인 셈이다. 신입사원일 때야 모든 것이 새로우니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라도 보여줄 수 있지만, 한 해 두 해 가기 시작하면 그저 감정 없는 눈빛이 되고 만다. 현실은 싫지만, 그렇다고 그를 대체할 다른 꿈이 없었으니 자고 나면 내일, 금요일 뒤는 토요일로 살았다. 열정으로 똘똘 뭉친 어른들의 눈에 나는 겉돌거나, 지쳤거나, 주눅 든 사원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들과 다르다는 괴리감은 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에겐 왜 그만큼 의 열정이 없는가 하는 자책감으로, 이후에는 자괴감으로 번져갔다. 좀 더 완성된 모습을 기대했던 서른이라는 나이는 별 것 없는 때로 그냥 그렇게 미지근하게, 미지근함과의 다툼으로 평소처럼 지나갔다.


뜨겁지 않아도 충분하다


먹고사는 것을 중요시하며 혼자의 살림을 오래 하다 보니, 나의 찬장에는 정말 다양한 그릇들이 함께하고 있다. 책에 보면 흙으로 빚은 이런 그릇들은 크게 세 분류인데, 도기(earthenware), 석기(stoneware), 자기(porcelain)가 그것이다. 셋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떤 온도에서 구웠는가 이다. 도기가 가장 낮은 온도에서, 석기가 그다음, 자기가 가장 높은 온도에서 구워졌다. 높은 온도에서 파손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보통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니, 도자기는 도기, 석기, 자기 순으로 발달했고, 자기를 가장 높은 가치의 것으로 보았다. 높은 온도에서 흙과 유약이 변형되며 합쳐져 얇으면서도 단단하고, 특유의 맑은 소리를 가진 것이 자기다. 그러나 모든 기술을 갖춘 요즘은 자기를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도기나 석기의 장점 때문에 이 모두를 생산한다. 도기는 그 온도에서만 낼 수 있는 따뜻한 색감과 열을 오랫동안 품는 성질이 있다. 된장국은 뚝배기에 끓여야 제대로다. 석기는 두툼하고 묵직해 오랫동안 음식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오븐에서 갓 꺼낸 치즈 요리는 한동안 식지 않는다. 자기보다는 합리적인 가격대로 좋은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다. 꼭 높은 온도를 품은 자기만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Porcelain)의 예 / 찻잔 종류는 가볍과 부딪히는 소리가 좋아 자기 소재가 많다
석기(stoneware)의 예 /  두툼한 석기류는 오븐요리에도 어울리지만 한식의 국을 담기에도 좋다.



도기(earthenware)의 예 / 따스한 색감은 석기나 자기가 따라갈 수 없다.


변화의 계기를 맞았고, 그 경험을 짧은 글로 적으며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았지만 사실 그 변화가 엄청난 꿈과 열정이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미지근한 나의 온도와의 싸움을 끝냈다는 결과물이라는 설명이 더 적합하다. 마치 이 고비를 넘기면 이거다 싶은 간절한 꿈이 생길 것 같은 시간과의 안녕이었다. 팟캐스트를 통해 들은 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엄청난 행운이다. 그렇지 않은 나머지가 우리 대부분이며, 이것저것 해보면서 살면 된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 모든 선택은 불확실함을 전제한다.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아닌 것 같으면 또다시 선택을 하고, 또 책임을 지면 된다.” 이제는 그만 미지근함과 싸움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지 싶었다. 높은 온도를 품은 자기는 시대를 초월해 최상품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 자기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좀 덜 뜨거우면 어떤가. 덜 뜨거운 도기, 석기도 각각의 성질을 살려 적합한 쓰임이 있으니 그대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삶이지 않을까. 쓰임새를 인정받는 이들 그릇을 쓰고, 닦고, 정리하다 보면 그 하나하나가 예쁘고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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