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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Feb 23. 2016

꼭 배운 대로 살 필요는 없다

그릇 연출의 반항, 모범생이 아닌 지금이 좋다.

나는 참으로 착실하게 살았다. 만원의 용돈을 받으면 그 만원을 오천 원씩 나누고, 한 오천 원을 다섯 개의 천 원으로, 한 개의 천 원을 백 원 짜리로 나누어 최소 단위만 휴대하며 사용하는 어린이였다. 번 외로 받은 용돈은 차근차근 저금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아이가 모을 수 있는 꽤 큰 돈을 모았다. 식사도 그랬다. 어릴 때도 알 수 없는 고기를 으깨 만들었을 햄을 먹지 않았고, 패스트푸드도 싫어했다. 과자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탄산음료도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마시지 않았다. 아침밥은 꼭 먹었다. 가정식사, 건강식단을 유지했다. 공부도 곧잘 했다. 전교 1,2등을 다투는 엄청난 성적은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는 해냈다. 착실하단 이야기는 학습 태도에서 비롯됐다. 내겐 벼락치기란 없었다. 시키지 않아도 아침을 먹기 전 30분이라도 공부했다. 시험 한 달 전 즈음부터는 시험공부를 했다. 대학 때도 그랬다.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주신 대학이니, 4년 내내 결석은 단 한번 이었다. 고등학생의 연장이었다. 한 달 전부터 시험공부를 하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칼같이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졸업하기 전 나름의 대기업에 취업했다. 어디에 이야기해도 착실하게 잘 큰 딸, 만나는 모든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다. 배운 대로, 정답대로 참 잘해내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19살 구매한 유리잔들 / 물은 물컵에 쥬스는 쥬스컵에 우유는 우유컵에 정해서 마셨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회사에 가보니 너무 달랐다. 학생 때의 우직함은 직장생활에서 눈치 없음으로, 때로는 무식함으로 여겨졌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조용하고 예의 바르기보다는 조금은 깐족거리고 조금은 잔꾀 부리고 재치 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실제 업무 성과 역시 좋았다.  이런저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넘실댔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배운 대로 살던 나에겐 아이디어가 없었다. 주어진 것을 성실하 게이행 할 뿐, 설계부터 해야 하는 단계가 되면 건전지 없는 시계처럼 멈추고 말았다. 학생 때처럼 착실하게 주어진 공부만 하면 그만인 삶은 끝났다. 배운 대로 살 필요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웠던 딸은 그 시절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의 내 모습은 소위 말하는 ‘집안 꼬라지’에서 드러났다. 사 모았던 예쁜 잔들은 찬장 저 위를 장식할 뿐 먼지가 수북하고, 단지 싸다는 이유로 대충 쓰려 샀던 접시들은 정말 대충 썼다. 군데군데 이가 나가고, 설거지는 한참을 하지 않아 곰팡이가 생기기 일쑤였다.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 출근하는 통에 방바닥에는 얽힌 옷가지가 수북했다.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안 대청소였다. 해묵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모두 제 자리에  정리정돈했다. 깨진 그릇은 모두 버리고 예쁜 그릇들을 꺼내 썼다. 장시간 조리한 음식을 그릇에 담으면 고운 마음이 살아났다. 먹고 싶은 그릇에 먹고 싶은 음식을 올려 먹는 기쁨. 너무 사소해 놓치고 있던 생각이지만, 음식과 그릇 앞에서의 나는 분명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주눅 들어 쭈구리가 됐던 영혼에 살이 차 올랐다. 적성대로 착실하게 공부해서 교수가 혹은 판검사가 되라는 말들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정답대로 살아온 내게 회의감이 들어버린 이상, 나는 이 자괴감을 돌파하고 싶었다. 20대 후반은 배운 대로가 아니라 원하는 대로, 나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트레이닝의 시기였다.


짝이 없는 그릇, 내 맘대로 쓰는 그릇


그간 집에서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나의 집에서 내가 잘 느껴진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do / don't로 제안하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나의 아이디어대로 활용하고 있다. 물과 주스와 우유마저 구분해 마시던 나는 정해진 용도에  구애받지 않으며 내가 쓰고 싶은 대로 그릇을 쓴다.  오래전 자른 머리카락과 빗을 담았던 그릇은 나의 쿠키 접시가 되었고, 깨진 컵에는 양초를 만들어 채워 넣었다. 깨진 접시는 쓰는 게 아니라지만, 나는 기어이 붙여 주얼리를 올려두는 데 쓰고 있다. 음식은 그냥 도마 위에 내기도 하고, 테이블 세팅에 예쁜 꽃이 아닌 흙당근을 올리기도 한다. 풀세트로 맞춘 그릇보다 짝이 맞지 않아도 흐름이 있는 그릇 연출이 좋다. 주어진 대로가 아니라, 나의 아이디어를 살려 활용되는 그릇들에는 내가 묻어있다.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렇게 쓰는 그릇들이 꽤나 마음에 든다. 꼭 배운 대로 살 필요는 없다. 칭찬은 조금 덜 받더라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


깨진 머그잔/ 소이캔들을 만들어 쓰고 있다
깨진 접시 / 붙여서 자주 쓰는 쥬얼리를 올려두고 있다
1930년대 머리카락을 담던 빈티지 그릇 / 쿠키접시로 쓰고 있다
독일산 티팟, 프랑스산 손수건, 핀란드와 미국산 접시와 영국산 포크가 만나 이룬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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