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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Nov 18. 2015

여행을 마시다

본래의 나를 되살리는 일상의 방식

첫 해외여행은 상하이였다. 수능을 마친 겨울방학. 아빠 친구들의 계모임 가족여행에 동행했다. 가족 모두에게 첫 해외여행이었다. 캐리어라는 것도 처음 끌어봤다. 첫 여권이 그렇게 생겼다. 드라마에서 보던 국제공항에 처음 가봤고, 첫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고, 첫 기내식을 먹었다. 처음으로 호텔에서 잠을 잤다. 처음으로 호텔 조식을 먹었다. 샤워가운이란 것도 처음 입어봤다. 사실 그 여행 자체에서 떠오르는 특별한 기억은 없다. 동방명주탑을 보았다는 사실 정도가 전부다. 빌딩의 모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첫 여권을 손에 쥘 때의 마음은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가 되어 오랜 시간 공생하는 중이다. 


그 여행 마지막에는 선물 사기 바빴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고모, 사촌동생들, 기타 등등의 기념 선물이 될 것들을 고르느라 혼났다. 보딩 타임을 넘기는 줄도 모르고 선물을 사다 별도의 차로 비행기까지 이동했다. 우리 때문에 기다렸던 수많은 탑승객의 눈총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상하이 이후 1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을 했고, 첫 회사에 취업을 했고, 퇴사를 했고, 유학을 갔고, 백수였고, 두 번째 회사에 취업을 하고, 두 번째 퇴사를 했다. 그 사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 기내식을 못 먹을까 봐 잠들지 못했던 여고생은, 못 먹은 간식도 요구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많이 컸다. 그 사이, 여행을 추억하는 나의 방식이 생겼다. 기념품 가게에서 넘쳐나는 기념컵 사기다.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보는 건 일 년에 몇 번 없는 이벤트다. 여행하든 동안의 깨달음, 인생의 영감은 좀 더 자주 기념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여행할 때 말한다. "다들 이렇게 여유 있게 사는데, 난 무얼 그렇게 바삐 생각했을까." 그렇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음 휴가를 기다릴 뿐, 지난 여행의 영감은 입국과 함께 사라진다. 다음 여행을 떠날 때 말한다. "아, 역시 이렇게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는구나. 그래, 인생 뭐 있어. " 그리고 또 잊힌다." 어디  먹고살기가 쉽나." 금세 또 타협한다. 타협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그런 10년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일상에서 벗어나 느꼈던 진짜! 속마음은 그리 쉽게 잊어버려선 안된다 생각했다. 나는 여행마다 기념컵을 사기 시작했다.


사실 살 때는 고민스럽다. 이렇게 촌스러운 컵이 썩 내키지 않는다. 기념품숍은 대부분 아이템별로 지나치게 잘 구분됐다. 비슷한 모양의 수많은 컵 중에 하나를 들어 계산대로 가져가기까지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이런 숍에서 물건을 사면 아마추어 여행객이 되는 것 같아 부끄럽다.  그러나 집에 가져와서 보면 느낌이 다르다. 

기념컵의 프린팅은 현지의 모습을 쏙 빼다 박았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여행지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홀로 커피나 차를 마실 때, 그곳이 떠오른다. 친구가 놀러 올 때 차를 내어주면 컵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된다. 여행의 즐거움과 마주쳤던 사람, 그들을 통해 느꼈던 것, 그곳에서 했던 생각을 되새긴다. 종교적으로 보면 일종의 기도다. 삶의 철학을 확인하고 나의 하루를 반성하며 내일을 다짐하는 일상의 계기다.


흔히 여행을 리프레시(refresh)하는 시간으로 여긴다. 단어를 찬찬히 곱씹어보면 리-프레시(re + fresh)다. 프레시(fresh) 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re), 즉 원래는 프레시 했다는 걸 전제하는 말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나의 번역은 '되살리기'다. 본래의 삶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여행이다. '나'답지 않은 삶을 떠나 '나'다운 모습을 찾는 시간은 중요하다. 여행에서 겨우 찾은 원래의 내 모습은 그렇게 쉽게 잊힐 것이 아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컵들은 '삶'을 상기시키고 '되살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일상은 고되다. 여럿 어우러져 의식/무의식적으로 서로 비교하다 보면 '나'를 잊는다. 이게 사회생활이라지만, '나'를 잊고 사는 동안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다. 여행하는 동안 만난 '나'는 참 반가웠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여행과 함께 나는 많이 컸다. 기내식 못 먹을까 걱정했던 여고생은, 실례와 안-실례를 구분할 줄 아는 어른/ 모르는 것을 묻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는 본디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꼭 컵이 아니어도 좋다. 나만의 수단이 아니어도 된다. 다만, 본래의 자신을 상기시킬 수 있는 수단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리-프레시를 희망하는 사람도 실천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프레시한 자신을 자주 마주하는 것이다. 오늘도 이 시간, 기념컵에 커피를 따른다. 여행을 마신다. 리-프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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