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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Jan 11. 2016

좋은 그릇, 좋은 사람을 생각하다

누군가에게 잘 맞는 사람이 되고픈 사람들에게

쓸수록 좋은 그릇을 만나기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 만큼 어렵다.


그릇을 쓰다 보면 샀을 때 알지 못했던 발견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불편함에 대한 것이다. 마냥 예뻐 보였던 둥근 모양이 칼질을 방해하기도 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는 세척이 힘들어 물때가 끼기도 한다. 바닥이 오목한 접시나 찻잔은 설거지 후 한참 동안 물이 고여있어 건조가 번거롭다.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의 마음으로 시작한 그릇도 쓰다 보면 70, 60.. 점수는 내려간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1인 가구의 경우는 점수 좋은 그릇 찾기가 더 어렵다. 여느 신혼살림처럼 4인조, 8인조 풀세트를 갖추긴 무리이니 일관성 있는 연출이 갖는 가산점을 일단 못 먹고 시작한다. 그러니 고를 때부터 눈이 만족하는 놈을 잘 골라야 하며, 쓰다 불편한 그릇은 서랍 안쪽으로 직행해 만회할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 한 번에 하나씩만 들이다 보니 크기도, 색깔도, 소재도, 국적도 다양한 그릇들이지만 결국 늘 쓰는 놈만 편애해서 쓰게 된다.  쓸수록 좋은 그릇을 만나기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 만큼 어렵다.



며칠 전에는 설거지를 하다 우연한 발견의 순간을 맞았다. 식사 후 세척을 마친 그릇을 비스듬히 기울여 세워두고선 남은 설거지를 마치며 그릇을 하나씩 엎어두던 어느 한 순간, 한 그릇이 다른 그릇에 기울어지며 "툭" 오목한 소리를 냈다. 두 그릇이 겹치며 내는 소리였지만 틈이 없어 울리지 않는 소리. 해와 지구와 달이 만나는 일식, 혹은 월식의 순간 같은 소리다.


왼쪽은 Jackie Lynd / 1977-87년 제작, 오른쪽은 Marianne Westman / 1972-81년 제작
일식처럼 두 그릇이 포개어진 모습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디자이너가 만든 그릇이니 이 둘이 합이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서양의 그릇들이 용도에 따라 어느 정도 비슷한 사이즈이긴 하니 크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위/아래가 맞아 들어갈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혼자 사는 집이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 있는 여러 개의 그릇 설거지가 내게는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잠시라고 했지만 눌러살다 시피 하는 동생의 동반 거주로 매 끼니 2인분을 만들게 되고, 그 뒷정리는 내게 흔치 않은 일상을 가져왔다. 만일 동생이 룸메이트로 잠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날 여러 그릇들 중 굳이 이 둘을 꺼내어 쓰지 않았더라면, 설거지를 하며 이 둘을 옆자리에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80의 마음을 100으로 채우는 것은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살림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뚜껑이 꼭 맞는 보관용기의 "딸깍" 소리, 서로 겹쳐지게 디자인된 찻잔을 포개는 순간 나는 폐쇄적인 울림, 뚜껑에 자석이 달린 듯 잘 맞는 냄비 뚜껑이 주는 기쁨을 말이다. 그릇이 포개어  맞아떨어지는 순간 내  마음속엔 별 다섯, 느낌표, 꽉 찬 원형 그래프가 그려졌다. 꼭 살림이 아니어도 비슷한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왼손잡이임을 배려해 상대의 왼편에  물 잔을 놓아주는 연인의 배려, 달게 먹는 엄마를 위해 주문한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가는 자녀의 배려, 감동이란 늘 이렇게 사소하다. 그러나 그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야 너와 내가 아닌 '우리'로서 서로를 느낄 수 있으니 그 울림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결국 80의 마음을 100으로 채우는 것은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합이 맞는 두 그릇은 기울여도 쉽게 쏠리지 않는다.



주말에 들춰본 어느 한 잡지는 '70억 인구 중 하나'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도는 사람'을 요구하는 시대와 패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의한다. 신입 이건 경력 자건 자기소개서 빼곡히 '나'의 역량을 앞세워 적어내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마치 내가 각각의 그릇이 예뻐 들여온  것처럼 '자체로 훌륭한' 사람을 찾는 건 짧은 시간에 서류 한 장으로도 가능하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엔 이런 효율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직장이건, 단체이건, 정치이건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나의 것으로 덮어 빛나게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의 판단은 기껏해야 80, 나머지 20을 채우는 데는 오랜 시간, 사소한 감동의 순간들이 쌓이며 채워진다. 좋은 그릇이라는 것,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 20이 좌우한다. 서로 다른 디자이너가 각자의 색을 내면서도, 합을 맞추되 그것을 내세우지 않아 그릇을 쓰는 이에게 100의 감동을 선사하듯, 우리에겐 조화를 위한 작은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하루다.




배려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을 여기에 공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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