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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Feb 15. 2016

그릇과 삶은 닮았다

직접 써봐야 알 수 있는 것들, 써보기 전엔 모르는 것들

몇 주 전 친구에게 컵을 선물했다. 매끈한 광택과 따뜻한 흰색, 산뜻한 튤립 패턴의 디자인이 친구의 고운 피부결과 호기심을 닮았다. 얼마 후 친구는 사용후기를 전해왔다. 입술에 닿는 부분이 둥글고 두툼해 우유를 마실 때 컵이 입에 가득 차는 것이 좋단다. 컵이 입술에 닿을 때의 감촉. 친구의 이야기에 20 여전 전 나의 첫 그릇이 떠올랐다.



백화점이 없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살았던 나는 엄마를 따라 수입품을 파는 동네 가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신발, 가방, 양산, 액세서리, 면도기, 믹서기 등등 그곳은 작은 백화점 같았다. 모두 수입품이니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브랜드에 대한 주인아줌마의 설명이 더해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의 주방용품이 좋았다. 일본에서 건너온 예쁜 도시락과 보온병, 꽃무늬에 금장이 둘러진 찻잔들, 예쁜 수저는 식탐 많은 나의 상상력을 더해주었다. 저 그릇에 밥을 먹으면 어떤 느낌일까, 저 찻잔에 차를 마시면 공주 같은 기분일까, 소풍 갈 때 저 도시락에서 김밥을 꺼냈을 때 어떤 맛이 날까. 그렇게 그 가게를 들락거리던 어느 날, 나는 운명의 컵을 만났다. 꽃밭의 곰돌이가 그려진 커다란 머그컵. 이것이 나의 첫 그릇이다.



컵을  사 온 그날부터 나는 먹을 수 있는 모든 액체를 그 컵에 담아 마셨다. 물이든 주스이든 우유든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쯤 유행하던 드라마에서 보면 하나같이 주인공 여자들은 큰 머그잔에 커피를 마셨는데,. 커다란 머그잔에 음료를 마시면 세련된 도시 여자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살 때는 몰랐던 불편함이 늘어갔다. 500ml 우유가 다 들어가는 커다란 크기는 일상적으로 물을 마실 때 고개를 하늘 끝까지 젖혀야 했다. 가장 큰 단점은 음료가 입 가장자리로 자꾸만 흘린다는 것이었다. 컵의 끝이 바깥으로 퍼진 형태라 닿은 입술이 함께 퍼져 액체가 모이지 않는 구조라 그랬다. 컵을 처음 사보니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컵의 모양은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해서 골라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써보기 전까진 입술에 닿는 감촉을 절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음식을 사기 전시식은 기본이요, 옷을 사기 전에 입어볼 수 있고, 화장품도 먼저 써볼 수 있고, 침대도 매장에서 누워볼 수 있다. 인테리어 시공도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릇은 예외다. 약수터 바가지도 아니고 이것만은 써보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최대한 고민하고 상상하되, 궁극적으로는 그냥 사보는 수밖에 없다. 사서 직접 써보고 나서야 입술로 감촉을 느낄 수 있고, 혀가 닿는 위치와 온도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4개월 전,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업무 불만족, 상사와의 마찰, 불투명한 미래, 진로에 대한 고민 등 이유는 다양했다. 옳은 결정이라는 100% 확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동료들은 모두 다시 생각해 보길 권했다. 이후의 대안을 세워두고서 그만두라는 조언,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첨언, 퇴사 후 고생하는 주변인들의 사례 소개, 재고하라는 당부의 기승전결 완벽한 논리는 내 마음속 불안을 증폭시켰다. 과연 옳은 선택일까.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지.


그러나 덜 행복할까 봐 무서워 안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미래의 행복만큼이나 현재의 행복은 중요하다. 그리고 미래는 어차피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안 행복했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였다. 퇴사가 최악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나는 무소속이 되었다.


그때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퇴사를 결심하고서 물건을 정리해 플리마켓에 팔았고,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블로그를 열었다. 블로그에 필요한 사진 찍는 기술, 사진을 편집하는 기술도 배웠다. 가상세계에서 소통하는 방식을 몰랐기에 첫 포스팅은 회사 보고서 같았지만, 계속 시도해보는 중이다. 전에 몰랐던 사람들을 알게 되니, 하고픈 사업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이 그만두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이래저래 찬장만 차지하던 나의 첫 컵은 어딘가로 버려졌다. 찾아보니 없다. 언제 버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컵은 지나치게 커서는 안되고, 입술과 닿는 면적의 모양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 컵을 사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컵을 사는 때나 퇴사의 결심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컵이 내게 맞는 컵인지 사기 전엔 알 수 없고, 퇴사 이후의 삶도 그만두지 않으면 모른다. 둘 다 시식도, 시향도, 무료반품기간도 없고 시뮬레이션도 어렵다.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할 거란 확신이 아니라, 행복할 것 같은 추측에 기반해 시도하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저 쭉 반복해가면 되는 것. 그릇과 삶은 이렇게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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