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면 지금의 내가 보인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러나 산으로 가는 모든 배가 많은 사공을 가진 것은 아니다. 혼자서도, 둘이어도 배를 꾸역꾸역 산으로 몰고 가는 때가 있다. 그 날이 그랬다. 연인과의 이탈리아 여행 마지막 날, 이른 시간 비행기를 타러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공항으로 향했다. 전날 밤 마지막 만찬으로 기꺼이 3인분을 시켜 꾸역꾸역 먹고서는 소화제를 챙겨 먹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마지막 조식을 챙겨 먹었다. 열흘 간 여행의 동반자였던 렌터카를 반납하고, 체크인을 했다. 세금 환급도 받고 면세점 구경도 하고, 마지막 에스프레소를 한 잔즐겨야겠다 생각하며 공항 검색대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줄이 줄어들고 우리 차례가 됐다.
your boarding pass please
티켓을 공항 직원에게 내밀었다. 바코드에 우리의 티켓을 대자 빨간불이 떴다. “no, tomorrow.” 짧은 영어지만 뭔가 잘못됐음은 분명했고, 공항 직원이 티켓에 적힌 날짜를 가리켰다. 티켓의 날짜는 19일, 우리가 공항에 간 그 날은 18일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단 황당하고 잠시 후엔 나의 실수를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여행은 늘 계획파인 내가 스케줄을 관리하고, 여유파인 그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카페나 식당을 섭외하는 편인데 이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서로의 암묵적인 역할분담이 되었다. 분명 이건 내 실수다. 하필 체크인 카운터의 직원도 날짜 확인 없이 티켓팅을 마치고 우리 짐까지 비행기에 실었으니, 사공의 수와 관계없이 우리의 배는 산으로 갔음이 틀림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다시 짐을 찾고, 일정대로 예약했던 렌터카를 돌려받으려 했으나 반납 절차가 모두 끝나버렸단다. 되는 일이 없다. 여행의 마지막은 그렇게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망친 기분으로 시작했다.
밀라노 외곽이지만 공항과 멀지 않은 레지던스를 즉시 예약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방금 커피를 한 잔 마시고도 잠이 쏟아졌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정신이 들고, 일찍 먹은 아침 탓에 배가 고파왔다. 호텔 직원에게 인근 레스토랑을 물으니, 고민하던 그는 가장 가까운 식당 하나를 추천했다. 주거단지라 식당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라자냐가 먹고 싶다 이야기하니, 그는 오늘 식당에 라자냐가 있을 진 모르겠다는 애매한 답을 한다.
식당에 들어섰다. 우리로 치면 욕쟁이 할머니 칼국수 집 느낌이다. 소박하고 따뜻하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담백했다. 손녀딸로 추정되는 아이 사진만이 손님을 미소로 맞이할 뿐, 할머니 사장님은 별 미소 없이 우릴 맞았다. 자리에 앉으니 무얼 먹을지 묻는 눈치다. 어찌 된 것이 영어 한 마디가 통하지 않고, 메뉴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 이곳은 정해진 메뉴가 없이 그 날 그 날의 재료에 맞추어 오늘의 요리만 하는 곳이구나. 그래서 라자냐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답을 했던 것이구나 깨달았다. 영어가 없으니 제대로 된 현지 식당에 온 기분에 아침부터 쭈굴쭈굴해졌던 기분이 신나 졌다. 단호하지만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그녀는 메뉴를 읊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네 가지 정도가 있었다. 뭔가 한 가지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영어 단어 ‘홈메이드’를 썼고, 그것에 볼로네즈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스톱! 그거요. 그걸로 두 개요” 상냥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말투로 그녀가 답했다. “sì”
정말 소박한 홈메이드 생면 파스타가 나왔다. 고기를 갈고 토마토소스로 조리한 볼로네즈 스타일이었고,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정직하게 느껴지는 훌륭한 맛에 빛의 속도로 포크를 돌려 댔다. 세 입쯤 먹으니 죽겠다 싶은 허기가 달래지고, 식당 내부를 둘러보게 되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역시 단 하나도 없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계산대 앞에서 주인 할머니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몹시 궁금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니, 한 두 해의 친분은 아닌 듯했다. 남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니 역시 모두가 와인을 한 잔씩 하고 있다. 지나는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이니 우리 테이블 앞에 와서 멈췄다. ‘스몰 와인?””레드? 로제? 화이트?” “레드.” 그녀가 또 단호히 답한다. “sì”
와인 맛이 기가 막혔다. 무슨 와인인지 물어봐서 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런 의사소통까지는 어려울 것이니 포기했다. 남은 파스타를 맛난 와인과 함께 즐기니 오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신나는 기분에는 디저트를 먹어야 했다. 이탈리아 여행 내내 즐겼던 현지의 티라미수를 또 먹고 싶었다. 이 할머니는 어떤 티라미수를 만들까. 그녀에게 또 손을 들어 보였다. “티라미수?” “노” 그 날은 티라미수가 없는 날이었다. 그녀는 그 뒤로 또다시 네 가지 정도의 디저트 메뉴를 설명하는데, 이번엔 알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눈빛으로 물음표를 만들어 보였다. 두 개의 눈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그의 눈까지 동원해 네 개의 물음표를 던지니 웃음 없는 그녀가 단호한 손짓을 한다. 따라오라는 이야기인 듯하여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주방에 놓인 냉장고 앞에서 그녀가 준비된 디저트를 하나씩 꺼내 보인다. 모든 것이 생소하지만 무얼 먹어도 맛있을 것이 틀림없으니 랜덤으로 하나 골랐다. 그녀가 또 단호히 고개를 끄덕인다. “sì”
파스타에 와인에 디저트까지 먹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전한 현금이다 떨어져 가 카드를 내밀었다. 분명 카드리더기는 있지만, 할머니는 작동법을 몰랐다. 옆 자리의 아줌마 손님이 대타로 나섰다. 처음인 듯 보이지만 알림 창의 메시지에 따라 단계별로 1과 2를 꾹꾹 누르니 결제가 끝났다. 문을 나서는 데 괜히 우리가 앉았던 자리로 눈길이 갔다. 다 마신 와인잔과 디저트 접시가 놓여 있는데 그 옆자리와는 무언가 달랐다. 현지의 아저씨들이 식사를 했던 자리에는 식사 중에 곁들였을 와인잔과 함께 식후에 마신 커피잔이 보였다. 다른 테이블도 마찬가지다. 누가 봐도 우리의 자리는 이방인의 자리, 관광객의 자리였다.
늘 계획하고, 하나를 하면 그다음에 무얼 할지 궁리하며 앞만 보던 여행에서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일어선 자리엔 우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냅킨은 바닥에 떨어졌는지 의자에 올려두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냅킨은 대충 접혀 테이블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먹는 것 앞에 예의는 없다는 주의인 그의 성격, 곧 죽어도 빵가루 없이 얌전히 먹어야 하는 나의 성격이 보였다. 그릇을 고를 때나 음식메뉴를 고를 때는 그 사람의 취향과 이상향이 드러나는데, 실제 사람의 현재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음식을 먹고서 남겨진 빈그릇이다. 어쩌다 생긴 하루의 시작, 남겨진 그릇들은 우리를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