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축제 밤 운동장 구석에서 술에 잔뜩 취해 입을 맞춰오는 여자선배를 껴안았다. 옅은 갈색 눈동자. 사춘기시절 내내 가슴 밑바닥에서 일렁거리던 그 눈동자를 떨쳐내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밤 나는 홀로 통과의례를 치렀다.
취기 때문인지 달뜬 분위기 때문인지 원래 그랬던 건지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상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나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을 지웠다. 그 후로 죽 내 연애대상은 이성이었다.
“딱 한번 아버지를 본 적이 있어.”
동생이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자식을 둘이나 낳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아니다. 두 번째 자식은 뱃속에 있을 때였으니 아버지는 한 자식만을 낳았고 한 자식은 자신의 부재 속에 태어나게 했다.
엄마는 동생이 아버지란 존재를 궁금해할 때면 죽었다고 했다가, 외국에 산다고도 했다가, 원래부터 없었다고 했다가 좀체 일관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유일한 친척이었던 할머니는 그 주제로는 아예 함구했다.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지쳤는지 언제부턴가 동생은 묻기를 포기했다. 반대로 평생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은 내게는 엄마는 일관되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언제?”
“아주 어릴 때”
“어릴 때 기억 못 하잖아.”
“그거 하나만 기억해.”
“어땠어?”
“엄마만큼 예뻤어.”
“뭐?”
동그래진 갈색 눈동자를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쏟아지는 별빛아래 가만히 누워 풀벌레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여기서 네가 편안해 보여.”
“사실 그래.”
“좋아 보여.”
“실은 나, 오랫동안 아기를 갖고 싶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결혼 초반에는 가끔 임신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는데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그저 자식을 갖지 않고 살기로 했나 보다 여겼었다.
"인공수정을 한 이 년 시도하고 나서 남편이 그만 포기하자고 했는데 내가 우겼어. 매일 처방약이랑 영양제를 한 움큼씩 삼키고 출근해서 시간 맞춰 탕비실 구석에서 주사를 배에 찔러야 하는 날이 허다했어. 산부인과에 가서 밑으로 자궁을 들쑤시는 게 남들은 곤혹스럽다지만 착상만 잘 된다면 그런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어."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도 힘들다고 생각 안 했는데 엄마 떠나고 얼마 안 돼서 어느 날 아침에 약이 안 삼켜지더라고. 아무리 넘기려 해도 애꿎은 물만 계속 들이켜다가 속에 있는 걸 다 토했어. 변기를 붙잡고 있다가 기절했나 봐. 병원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남편이 멍자국으로 딱딱해진 내 배를 만지며 울고 있더라. 힘든 줄도 모를 만큼 간절했었나 봐. 그날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았어.”
엄마는 자식 둘에게 공평하게 서로의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다. 묻지 않는 얘기를 절대 먼저 꺼내지 않는 엄마의 일관성에 처음으로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혈육에게 너무 무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원망일 것이다.
“지금도 치료 중이야?”
“아니. 여기 온 첫날부터 수면제 없이도 잠에 곯아떨어지더라고. 지금까지 다시 병원에 간 적 없어.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