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까지 선생과 식음료 정찬을 계속해나갔다. 다니는 길에 제법 익숙해져서 동생이 양봉일로 바쁠 때는 혼자 가기도 했다. 선생의 오랜 설득 끝에 울며 겨자 먹기로 봉침을 다시 맞았다.
“겁만 먹지 않으시면 됩니다.”
“겁이 나는걸요.”
“꿀벌은 제 목숨을 내놓는 겁니다.”
침이 살갗에 닿는 순간, 제 손으로 자기 배를 수없이 찔렀을 동생을 생각하며 용기를 쥐어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울퉁불퉁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벌독으로 부어오른 데가 아프면서도 가려워 벅벅 긁으면서 동생의 배를 상상했다. 빼곡한 주삿바늘 멍자국으로 뒤덮인 살. 그 살을 끌어안고 사느라 얼마나 아팠을까.
어느덧 과실나무들이 알토란 같은 제 자식들을 조랑조랑 매달았다. 마루에 앉아 동생이 깎아주는 감을 먹으며 마당 끝에 있는 저 감나무에서 딴 거냐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보이잖아.”
“보여? 저기 감이?”
“희미하게...... 보여.”
생각해 보니 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설거지를 할 때면 싱크대에 코를 박을 정도로 숙여야 해서 그릇과 얼굴을 같이 씻는 효율적인 기술을 선보였는데 며칠 전부터 허리를 세우고 온전히 그릇만 세수를 시키고 있었다.
또 색깔이 보였다. 모든 사물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혼합된 색으로만 보였는데 얼마 전부터 각각의 색들이 추출돼 색색 크레파스 수준은 아니지만 울긋불긋한지 푸르죽죽한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감나무에 찍힌 붉은색 점들이 보였던 것이다.
소식을 알리러 선생에게 한달음에 쫓아갔다. 우리의 호들갑스러운 소식에 비해 선생의 반응은 차분했다. 이제 혈이 돌기 시작했으니 잘 먹고 마음을 평안히 가져 기를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다음날부터 식음료 정찬에 명상 시간이 추가되었다.
첫서리가 내릴 즈음 마지막 꿀채집을 끝내고 동생네 지인들에게 인사와 배달을 겸해 서울을 다녀올 일정이 잡혔다. 나 역시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기도 했고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 옷가지를 가지러 대구에 함께 들르기로 했다.
소지품을 챙겨 넣다가 가방 속에서 전원이 꺼진 채로 방치된 휴대폰을 발견했다. 전에는 신체 일부 같았던 까마득한 도시유물이 이제 내 손에 생경했다. 전원을 켜자 알림음이 한 번 울리는가 싶더니 휴대폰이 요란한 연주를 해댔다. 여러 곳에서 문자가 쏟아졌다.
거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익명의 문자들 중에 아는 이름이 보였다. 팀장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의 연락에 멈칫했는데 막상 열어본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예전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들었다. 팀장이 나의 사표를 바로 수리하지 않고 병가와 연차 처리를 해가며 한참 버티다 회사의 눈 밖에 난 것부터 눈에 가시처럼 굴다 결국 책임을 뒤집어쓰고 퇴사한-거의 쫓겨난 사건, 팀장이 새로 꾸린 작은 업체에 자신이 이직한 일까지 길고 긴 이야기였다. 도대체 왜 연락이 안 된 거냐는 동료의 타박에 되물었다. 도대체 왜 기다린 거냐고.
“과장님만큼 일을 잘해줄 사람이 없었겠죠.”
도시유물이 손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점점 따뜻해져 왔다. 내일 꼭 얼굴 보자는 약속을 잡고서야 통화가 끝이 났다.
얼이 빠져 멍하니 동료의 말을 곱씹었다. 밤샘과 야근으로 쌓아 올린 노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헐값 매겨진 내 커리어를 제값 쳐주려고 애썼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 한켠이 시큰거렸다.
계속해서 메시지 정리를 하던 중에 또 하나의 뜻밖의 문자를 발견했다.
‘하유미 님. 원장님께서 긴급히 연락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병원’
퀭하고 충혈된 두 눈의 의사가 떠올랐다. 그 의사를 선생이 본다면 남을 치료하기 전에 자신이나 먼저 돌보라며 봉침을 들이댔을지도 모른다.
“아! 이제야 연락이 되는군요. 한참 기다렸습니다. 저, 제가, 그러니까 한 달 전쯤에 학회에 다녀왔는데 말이에요, 글쎄 환자분과 똑같은 케이스를 봤단 말이죠. 그런 환자가 또 있더란 말이죠. 새로운 치료법으로 임상 중인데 상당히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런 케이스가 없어요. 첫 발병인 셈이죠. 환자분께서 마음만 먹으면 저희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경과에 따라서 어쩌면 제가, 아니 저희가 세계최초 성공사례가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말에 도취된 연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의 제안이 의사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개인의 이익을 노린 것인지 어느 범주에 드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기회 앞에서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동생에게 알리기 전에 선생을 먼저 만나러 갔다.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길게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 한낮시간이 아닐 때도 잘 다니십니다.”
“좀 더 어두워져도 예전보다 잘 보입니다.”
“그것 참 좋습니다.”
내게서 병원소식을 다 전해 듣고 선생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시 마음의 허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생긴 병입니다. 마음이 충만해지셨으면 어디에 있든 몸만 잘 돌보면 될 일이지요. 방법은 도구일 뿐 중요한 것이 아니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될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그는 대신 명상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제 동생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자매가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더 이상 내 눈에 그는 미치광이와 도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작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선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