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유미 Oct 17. 2024

어쩔 수 없는, 꼭



동생에게 염려는 단단히 붙들어 매 두고 서울을 다녀오라고 했다.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괜찮아. 불편이야 하겠지만 혼자 못 지낼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언제까지 네가 내 보호자일 순 없잖아.”


치료를 잘 받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더 받고 동생네는 떠났다.

점심때 약속했던 직장동료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집으로 왔다. 몇 달간 비어있던 공간에 들이닥친 인기척은 적막을 깨뜨리며 오랜만인 주인을 침입자로 만들어버렸다. 낯선 편안함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한 뭉치 우편물을 식탁에 던져두고 소파에 기대 누웠다. 짧은 외출에도 몸이 쉬 지쳤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일상적이어서 무의미하던 도시의 풍경이 과도한 자극으로 느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료가 된다는 보장이 없어요. 얼마나 더 좋아질지는……. 같이 못한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이해합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팀장이 입을 열었다.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 한 번을 안 대더니 본인한테는 왜 그 말이 쉬워?”

“어쩔 수 없으니까요.”


디자인 업계에 일하면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건 이제 어쩔 수 없어졌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또 그러네. 하 과장이 거절한다면 나로서야 정말 어쩔 수 없지만, 꼭 와주면 좋겠어. 당장 예전 같은 일이야 그렇겠지만, 다른 할 일도 많으니까.”


소파에 누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을 거꾸로 되감았다.

하루아침에 내게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눈. 직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해내는데 익숙해져 있던 무감각. 삶을 어쩌지 못해 부유하던 어린 날. 엄마가 떠난 뒤 발견한 통장. 거기에 찍혀있던 꾸준히 돈을 보낸 입금자명. 나와 성이 같은. 갈색 눈동자. 어쩔 수 없이 떠나며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사람들.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했던 지친 여행의 끝이 서서히 보인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만들지 못한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매몰되거나,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일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선택지를 골라야 할 때이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꼭, 말이다.




이전 10화 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