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시작하다
큰 아이를 출산한 지 딱 95일만에 쓰러졌다. 허리디스크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 입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허리디스크 환자가 일반적이지만, 20년 전에만 해도 20대 후반 새색시가 허리디스크로 쓰러지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뭐.. 어찌되었건 거실에서 시댁, 친정식구들이 모여 알아서들 백일 파티를 할 동안, 안방 침대에서 웃음소리와 이해되지 않는 허리디스크 병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누워있었다.
내 몸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드니, 백일된 아이는 친정과 시댁, 그리고 교회 집사님들에게 두루두루 키워졌다. 홀로 걷기도, 화장실 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함을 표현할 여력조차 없었다.
백일된 아이도, 아이를 낳은 산모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우리들병원, 21세기병원 등 유행을 타며 개원한 서울시내의 유명한 허리병원들은 다 다니며 이것저것 안해본 것이 없다. 각종 신경주사, 마취주사는 다 맞아봤다.
그 당시 압구정에만 나홀로 있었던 자생한방병원을 다니면서 봉침, 약침, 추나치료 등 안해본 치료가 없다. 여러 허리 병원들과 자생병원이 여러 곳에 분원을 낸 것에는 나의 병원비 기여도가 꽤나 크다고 본다.
신경치료를 하던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이 신경치료는 아픈 신경을 마취해놓는 거에요. 효과는 1년 정도 갈껀데요. 나은게 아니니 그 1년동안 재활치료를 해야합니다. 수영도 좋고 아쿠아로빅 추천합니다."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수영보다 아쿠아로빅이 더 괜찮을 것 같은데?"
남편의 의견에 따라, 집근처 구립 수영장 '아쿠아로빅'에 등록했다.
드디어, 아쿠아로빅 첫날이다. 영차영차 수영복을 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수영장 레인이 있는데, 아쿠아로빅할 때도 레인이 원래 있는건가 의아해하던 찰나.
"아니, 아가씩! 아니, 새댁인가? 암튼, 늙은 우리가 할수는 없고 레인 좀 눈치껏 옮기지?"
"네?"
"처음왔나? 아쿠아로빅 직전까지 수영 강습이 있어서, 레인줄은 아쿠아회원들이 조금 일찍 입수해서 치워놔야해. 우린 나이도 있으니 자기가 좀 이거 들어 옮겨."
"..................."
'제가요. 지금 혼자 걷는 것도 힘들거든요. 레인까지 질질 끌 체력은 더더욱 안되요!'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줄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뼈사진으로는 80대, 홀로 걷지 못하는 상태의 골골이 허리디스크환자가 아무리 끌어도 레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젊은 처자가 왜 이리 힘이 없어?"
"어머, 환자인가봐.. 등이 왜 이래!!"
뻥 뚫린 수영복 등 라인에 보이는 각종 주사자국, 부황자국 등 처치자국은 레인 하나 못끈다고 구박하던 어르신들에게도 가관으로 보였나보다.
"아니, 그럼 말을 하던가. 왜 사람 미안하게 만들고 그래요?"
"..........................."
아니! 내가 말을 할 틈이나 주고 시켰냐고요!!! 욱한다, 욱해.
어찌저찌 아쿠아로빅 시작 시간이 되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음악에 맞춰 다들 열심히 춤을 추었다.
아... 물 속에서는 그래도 자유롭게 움직여질 줄 알았다. 5분도 채 안되어 넋다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까와는 또다른 어르신들이 나를 쏘아보시며 젊은 사람이 레인줄 좀 당기라고 성화셨다. 그냥 내 등짝을 보여드리며 말했다.
"다음에 할게요. 제가 허리가 많이 안좋아서 움직이기 힘들어서요."
"어디가 아픈데? 허리는 왜 그러는데?"
샤워실에서 어르신들에게 신상과 병명이 털렸다.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내 등을 보고 병원과 병원비를 물어보시며 다들 끌끌 혀를 차셨다.
솨야야야아아. 샤워기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정했다. "아쿠아로빅 하다가 울화통으로 쓰러지겠다. 아쿠아로빅, 처음 만났지만 이제 안녕."
그렇게 아쿠아로빅의 첫수업이자 마지막수업을 마치고 수영 초급반으로 등록했다.
자유형 발차기는 정말 힘들었다. 나가지도 않는 발차기를 무한 반복해야한다니. 이넘의 발차기, 정말 허리에 도움이 되는 거 맞아? 의사쌤, 이거 맞는 겁니까?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영 초급반에는 젊은 회원의 신상을 당연하게 털어줘야한다는 텃세 어르신들이 없어서, 행복하고도 힘겹게 발차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수영이 없는 하루하루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어쩌면 수영으로 누리는 행복은 약 20년 전 아쿠아로빅의 텃세 덕분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심지어 불쾌했던 경험들이 예상치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쿠아로빅 어르신들의 텃세가 없었다면, 나는 평생 수영과 인연을 맺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허리디스크로 쓰러져 누워있던 그 시절, 백일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 날들이 결국 오십을 앞둔,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아준 셈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쿠아로빅 텃세 때문에 시작한 수영이, 지금은 덕분이 되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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