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먼 25m
약 이십년 전, 허리디스크와 아쿠아로빅 텃세 덕분에 수영강습을 시작했다. 험난한 자유형 발차기와 호흡법을 익히며 자유형과 배영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우아한 평영을 상상했건만, 허리의 통증으로 의사선생님과 수영 강사님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평영과 접영은 시작하지도 못했다.
강습반 1번에 서서 자유형으로 나가면 나머지 회원들은 접영으로 뒤따라왔다. 다른 분들이 평영을 구사할 때는 나 홀로 배영으로 오갔다. 시작도 못하고 달게 된 '평영 포기자', '접영 포기자'의 타이틀. 서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수영장과 거리가 먼 제주도 시골로 이사를 가면서 수영조차 포기하게 되었다.
"Welcome back to Seoul!"
2023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매케한 매연과 복잡한 교통에 두통이 올라올 즈음 남편이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알아보니깐, 걸어서 다닐만한 수영장이 있더라. 걸어서 10분. 나는 좀 더 먼 곳에 가서 레슨을 받고, 니 허리로는 어차피 평영, 접영, 오리발, 플립턴... 전부 금지니까 레슨보다는 자유수영 시간 널널한 곳이 낫지 않을까? 내가 딱 알아봤어."
그렇게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나 홀로 자유수영.
얼마만에 물질인가.
"회원님, 갈 때는 자유형, 올 때는 배영으로 한 번 다녀오세요. 다른 회원님들은 이 분 자세를 잘 보세요. 자유형과 배영의 교과서입니다."
그 옛날 강사님께서 시범을 보이라고 하셨던 때가 떠올랐다. 다시 그때의 교과서 자세를 뽐낼 수 있을까? 수영복을 어디다 넣어뒀더라. 물안경은 너무 낡았는데. 이 참에 하나 장만해야 하나. 샴푸는 어디에 덜어가지. 사람들은 많을까. 수질은 어떨까.
"와! 수영장 4개 레인에 아무도 없잖아! 황제수영이다!! 오늘 수영 오길 완전 잘했구나."
나 홀로 수영장을 누비는 것을 황제수영이라고 한다. 수영장에 나밖에 없다. 수영인으로의 복귀를 환영한다는 듯 수영장을 전세내준 것 같다.
하나, 둘, 하나, 둘... 다리도 풀어주고 어깨도 돌려주고. 하나, 둘, 하나, 둘.
추~~~~~~~~~울~~~~~~~~~~~발.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왜 안 들리지? 헉헉, 숨차다. 25m 수영장이 아닌가? 이거 50m인가? 견딜 수가 없어서 물속에서 멈췄다. 가다가 멈추면 안 되는데. 일단 아무도 없었으니 일어서본다. 50m 아니고 25m 맞는데?
왕년의 자유형 교과서가 이렇게 25m도 한 번에 못 간다고? 이건 말이 안 된다. 헉헉, 헉헉헉. 다시 가다가 또 멈춘다.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생각한다.
'25m가 원래 이렇게 멀었나. 끝 지점이 생각보다 더 멀구나. 숨이 차다, 힘들다, 녹초가 되는 것 같다. 집에 가고 싶다. 자유수영 입장권이 아까우니, 일단 오늘은 더 수영하자.'
열심히 헉헉거렸다.
약 20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수영, 지치고 힘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힘들지 않고 천천히 여유로운 수영을 바란다면 양심에 털이 난 것 아닌가. 금세 헉헉거리는 저질체력이라도 조금씩 매일 연습한다면 다리 근육도 강화되고 호흡도 트일 것이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셀프 토닥이며 물을 헤쳤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했다. "목표는 여행이 아니라 도착이다." 나에게는 25m를 한 번에 헤엄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거리는 짧지만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25m를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보일 테다. 매일 물살을 헤치다 보면 헉헉거리며 물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물살 위에 올라탈 수 있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못한 일을 내일 하자."
나도 그렇다. 오늘 25m를 한 번에 못 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내일 다시 도전하면 된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믿음으로.
20년의 공백이 만든 벽은 높았지만, 매일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수영장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이미 시작이다. 헉헉거리는 것도 진전이다. 멈췄다가 다시 가는 것도 전진이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물살을 헤치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내 속도로 나아가겠다. 언젠가는 도착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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