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 심사를 위해 줄을 섰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흑인이 갑자기 말을 건넨다.
- Hey, how are you? Are you coming from Seoul too?
(너도 서울에서 오는 길이니?)
출장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왔다는 그는 서울에서의 경험이 너무 좋았다며, 반가워 말을 걸었다고 했다. 이것이 호주에 도착해서 마주한 외국인과의 첫 대화였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친절하고 영어가 잘 들렸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대화를 이어갔다.
- Cloud you recommend traditional foods in Australia? I would like to eat, morning eat, 그러니까, um, breakfast, it's my first time here!
(맞아. 반가워. 아침을 뭔가 먹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음, 호주 전통 음식 같은 거 있으면 추천해 줄 수 있어? 난 여기가 처음이야!)”
그는 웃더니 호주는 그런 게 없다고 했다. 그냥 모닝커피에 스크램블 에그나 먹으란다. 외국사람들은 달걀 프라이를 좋아하나? 궁금한 것도 많고 말을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엄격한 입국심사장 분위기 속에 그만 떠들어야겠더라. 잠시 후 내 차례가 되어 긴장한 얼굴로 심사관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여권에 도장만 찍어 주더니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짐을 찾고 나와 천천히 둘러보니, 생각보다 간판 곳곳에 한국어가 꽤 보였다. 나는 살면서 '브리즈번'이라는 곳을 처음 알았는데, 여기는 한국인에게도 유명한 지역이었을까? 아니면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 열풍이라더니 정말 한국어의 위상이 이 정도까지 올라간 걸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시내로 들어갈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그때 벤치에 앉아 있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로 보이는 한국인이 보였다. 심지어 내가 끌고 온 캐리어의 디자인과 색깔까지 같아 신기하고 반가웠지만 모른 척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어렵게 결심하고 온 먼 길인데, 여기 온 이상 무조건 영어만 쓰겠다고 비행 내내 생각했던 터라 첫날부터 한국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길을 찾아가는 건 쉬웠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둔 로마스트리트 공원 옆의 한 백패커*로 갔다. 얼마 전 그곳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생각났지만, 화창한 여름 아침 공기에 그 공포감은 금세 사라졌다.
백패커: 보통 다인실이며, 여러 가지 공유 공간을 제공하는 호스텔 형태의 저렴한 숙소
너무 아침 일찍 도착해서 그런지, 리셉션 데스크는 꽤 분주해 보였다. 그 앞은 온갖 빨아야 할 침구 더미와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객의 짐으로 가득했다. 체크인을 하러 직원에게 다가가 여권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3일 치 예약은 잘 되었으나, 결제가 되지 않았으니 돈을 다시 내라고 했다.
분명 한국에서 결제를 하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었다. 상황설명을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미리 출력해 온 이제 확인증을 보여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염병, 이건 왜 영어로 출력해 올 생각을 못했을까?
일단 내 짐이 너무 무거우니 가방을 여기에 놓고, 잠시 시내에 있는 은행을 좀 다녀오고 싶다고 말을 해야겠다. 하지만 당황을 하니 직원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고 단어도 생각 나질 않았다. 바쁜데 계속 어버버 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직원이 갑자기 짜증을 내며 뭐라고 한다.
- I bet you don’t understand a single word I'm saying, do you? Can you even speak English?
(지금 내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지? 너 영어는 할 줄 알아?)"
뭐야, 저년 저거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그런데 또 문장은 왜 이렇게 전치사들까지 쏙쏙 잘 들리는지 모르겠다. 일단 울며 겨자 먹기로 갖고 있던 신용카드로 3일 치 숙박비를 결제하고는 방을 배정받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3층으로 배정해준 불친절한 그녀에게 소심하게 속으로 욕을 하며 짐을 두기 위해 끙끙대며 올라갔다.
좁은 방에는 2층 침대가 3개나 있었다. 바닥은 청소를 며칠째 안 한 것처럼 온갖 휴지와 쓰레기가 뒹굴었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창가 쪽에 있던 2층 침대는 누군가 위아래로 전체 이불을 덮어 두었다. 놀라운 건, 그 안에서 한 커플이 섹스를 하고 있던 게다. 또 한쪽에는 키가 2m나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아일랜드 남자애가 속옷까지 모두 벗고 엉덩이를 보인 채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은행 계좌도 열어야 하고, 일단 휴대폰 개통부터 해야하니 일단 시내로 가야겠다. 사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가방만 구석으로 밀어둔 채 지도를 보고 한참을 걸어 시내로 향했다.
미리 신청해 둔 은행에 방문하여 계좌를 열고 체크카드를 받았다. 그리고는 휴대폰 개통을 위해 알뜰폰 유심을 사러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유심이 보이지 않았다. 고객센터에 가서 물어보니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판매하지 않는다는 게 일시 품절이라는 건지, 통신 서비스 자체를 중단한다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급한 마음에 근처 휴대폰 매장에 가서 선불형 유심이 있냐고 물었다.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주어 차근차근 개통할 수가 있었고, 마트에서 판매한다던 그 저가형 통신서비스는 몇 달 전 종료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집에 전화를 했더니 동생이 받았다. 내가 출국할 때까지 아무 내색 없이 응원만 해 주셨던 부모님은 그날 저녁 내가 방에 남기고 온 편지와 선물을 보고는 펑펑 우셨다고 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송했다. 기분이 울적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겪은 일을 생각하니 이 영어 실력으로 앞으로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더 커졌다.
잠시 바람도 쐴 겸, 무더위에 목이 말라 다시 마트로 가 가장 저렴한 1.5L짜리 생수를 한 통 샀다. 밖으로 나와 분수대 앞에 걸터앉아 뚜껑을 열었다. 순간 탄산 기포가 터지더니 얼굴부터 옷이 모두 흠뻑 젖었다. 탄산수였다.
순간, 얼굴에 발랐던 선크림이 녹으며 눈에 들어갔는지 엄청 따갑고 아팠다. 백패커에서 겪은 일에 대한 속상함과 공포감, 그리고 나머지 모든 짜증이 갑갑자기 끌어 올라 눈물이 났다. 그렇게 나는 또 펑펑 울었다. 그 큰 시내 한복판에서 다 큰 성인 남자가 울고 있으니 이상해 보였나 보다. 하나 둘 흘깃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불편해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났다.
옆 골목으로 지나 계속 걸었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인형같이 엄청 예쁘게 생긴 외국인 커플이 달려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외국에도 도를 믿냐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얘들이 쌍으로 돌아다니는 건가? 경계심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게 관심을 갖고 내 영어를 들어줄 원어민을 만난 건 순간 행운 같았다. 천천히 다시 영어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말을 걸어 보았다.
- In this morning, I just arrived in Brisbane alone. I miss my family. I miss my mother. I should do everything by myself. By the way, I was surprised at backpacker. One couple was doing sex in my room. One tall guy sleep all nude. I got culture shock!
(오늘 아침에 나 혼자 여기 브리즈번에 왔어. 나는 가족이 그리워. 벌써 엄마가 보고 싶어. 나는 모든 걸 혼자 해내야해. 그런데 말야, 아침에 백패커에 갔는데 너무 놀랬어. 남녀가 같이 섹스를 하고 있고, 어떤 키 큰 애는 모두 벗고 자고 있었어. 문화 충격이야.)
하지만 그녀는 '충격(shock)'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이해해 보려는 지 '샤크', '슈아크', '쇽' 등등 본인이 발음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더니 갑자기 현타가 왔는지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말하는 게 어떤 뜻인지 이해했다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남자는 내 옆에서 지키고 있고, 여자는 옆 건물 화장실로 뛰어가 휴지를 한 움큼 가져와 얼굴을 닦아주고는 계속 말을 했다.
- I came to this little village in England on a working holiday visa, just like you! I'm only twenty, and even though I'm young, I'm doing well here. You can do it too! I’ll be your friend. And what you saw isn’t weird at all; it’s just a different culture! Different!
(나도 영국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너처럼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왔어. 나는 이제 스무 살인데, 어리지만 이렇게 타지에 와서도 일을 구해서 잘 지내고 있잖아.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친구가 되어 줄게. 그리고 네가 본 건 이상한 게 아니야. 그냥 단지 문화가 다를 뿐이지. 디퍼런트!) “
- 디퍼런트… 그래, 내가 너무 촌스럽게 군 건 아니었을까? 저렇게 어린 얘도 잘 지내는데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까지 졸업한 내가 못할 게 뭐 있겠어. 아니, 잠깐! 그래도 넌 원어민이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