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치다.
나에겐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 주먹을 가진 키 작은 마징가 Z가 있다. 항상 곁에서 굳건히 지키고 서있는 기운 센 천하장사. 우리는 그를 OJ라 부른다.
아주 어릴 적 몇 안 되는 기억 속의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어린 마음에 그의 손을 잡고 다니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에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두툼한 손에 따뜻함이 더해져 작디작은 내 손이 폭 감싸지는 듯한 그 느낌. 그런 그와 보내는 시간은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 상 해외출장이 너무도 잦았던 터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 물론 항상 선물과 함께 한국으로 오셨기에 내심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출근시간과 겹쳐 그의 차를 타고 등교하는 날이면 내 어깨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냥 그가 나에겐 마징가 Z라서 자랑하고 싶으니까. 정말 잠깐이었지만 교문 앞에 정차하여 인사하는 그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행복 그 자체였다.
OJ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었다. 퇴근길에는 항상 서점에 들러 사 온 새책들과 함께였고 밤에 자다가 잠깐 깼을 때면 그는 늘 항상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에서 수시로 영어로 통화하는 걸 보고는 하던 걸 멈추고 구경하기도 했다. 물론 들키지 않게. 이런 모습들이 어린아이의 시선엔 얼마나 대단해 보였을까? 천하장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너무나 높은 존재였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된 후, 나는 그리 다정한 사람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에도 말로 하는 표현에 익숙지 않아 편지에 글을 담아 전하곤 했으니까. 그 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런 OJ와 나 사이에도 아주 특별한 계기가 생기게 된다. 무뚝뚝한 두 사람의 성향을 180도 바꿔놓았던 확실한 순간, 바로 천사가 세상에 내려온 날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할아버지가 된 그날, 그는 대형마트에 들렀다. 거의 처음이었다. 그곳을 혼자 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고 그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살뜰히 챙겨 병원으로 왔다. 정말 전부 다. 뭐가 놀랄 일이라는 거지? 싶겠지만 사람 많은 백화점을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때 오랜만에 울리는 마음의 소리, '내 손을 폭 감싸던 그 두툼한 손이 보이지만 않을 뿐 늘 항상 같은 곳에 있었구나.'
그 후 자칭 타칭 "손녀바보"라고 불리는 우리 OJ. 누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는 그 말이 다 맞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중이다. 1년에 단 한번 12월 31일에만 사람 많은 곳에서 연말 모임을 했던 그가 손녀들의 말 한 마디면 놀이공원까지 섭렵해 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모래놀이를 좋아하는 손녀를 위해 모래를 직접 사서 모래산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푸딩이 먹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마트에 파는 푸딩을 전부 사온 적도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딸이 더 가까울 텐데 외손녀가 그리도 좋으냐고. 세상 아깝지 않은 그 딸이 낳은 아이라서, 내 아이가 낳은 더 작은 아이라서 사랑으로 가득한 게 아닐까?
기운 센 천하장사도 늘 굳건하게 지킬 필요 없이 가끔은 쉬어갈 때도 필요하다. 이 글이 공유됨으로써 우리의 마징가 Z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적어도 내가 그동안 썼던 편지보다는 더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OJ만의 방법으로 내 손을 포근히 감싸 쥐고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마치 마트에서 손녀딸을 위한 초콜릿과 젤리를 쓸어 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