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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Sep 26. 2023

더 좋은 세상 있었나 보네

(엄마의 시 2)


더 좋은 세상 있었나 보네


아플 때마다

병원 데려가주고

아침저녁으로

약 챙겨주던 남편


"내가 아프면

누가 데리고 다니나?"

나만 보면

매일 걱정하던 사람


이렇게 슬며시

먼저 떠나버리면 어쩌라고

아무래도

예보다 더 좋은 세상 있었나 보네.     




엄마와 아버지는 심장과 관련된 병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왔다. 금슬이 얼마나 좋았던지 아버지가 달았던 심장박동기를 그 이듬해 엄마도 똑같이 따라서 달고 말았다. 심장 박동기를 단 지도 벌써 두 해가 넘어간다. 지난번 검진 때 의사는 '앞으로 수명 6년 보장'이라는 말을 했다. 그때 89세였으니까 95세까지는 너끈히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체격이 건장하고 노인답지 않은 빠른 걸음걸이로 씩씩하게 걸었다. 특히 길눈이 무척 밝은 편이다. 길눈뿐만이 아니라 실제 시력도 좋아 작은 신문 글자도 돋보기 없이 읽을 정도다. 그에 비해 엄마는 지적인 총기는 젊은이 못지않으나 걸음걸이가 불안하고 길눈도 무척 어둡다. 집 근처까지 다 와서도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고 둔전거릴 때가 많다. 그래서 어디를 가건 길눈 밝은 아버지가 성큼성큼 앞장을 선다.


아버지는 여든에도 정기검진 할 때마다 세브란스로 직접 차를 몰고 다녔다. 80대에 운전대를 잡는 모습이 늘 불안하여 운전을 그만하시라는 자식들의 독촉이 빗발쳤다. 점차 겁이 나시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면허증을 슬그머니 동사무소에 반납해버렸다. 그 뒤로는 병원에 가실 때마다 자식들이 두 분을 모시고 다니게 됐다.


그 복잡한 세브란스 병원의 길목을 훤히 꿰뚫는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성큼성큼 앞장선다. 검사실과 진료실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 갈 때마다 헛갈려하는 나와서 달리 한 방에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심장혈관센터에 도착해서 아버지는 컴퓨터에 내원했다는 셀프 신고를 하고, 컴퓨터가 출력해 준 접수증을 뽑는다. 채혈실 앞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순서가 되면 채혈을 한다. 심전도실 앞에서도 번호표를 뽑고 심전도 검사를 한다. 그 뒤에 영상과에서 X레이를 찍고, 심장박동기 점검도 받는다. 이 모든 검사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진료실 앞에서 2시간 정도를 기다린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도 "결과가 아주 좋아요. 2개월 후에 오세요"라는 말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환한 얼굴로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번 남기면서 손을 흔들며 진료실을 나선다. 간호사가 준 다음 진료 예약증을 받고 약처방을 받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병원 문을 나서면 오늘 일이 끝난다.


처음에는 낯설던 병원 구조가 이제는 내 눈에도 훤하다. 엄마와 나를 꽁무니에 달고 앞서 걷던 아버지의 덕이다. 차를 운전해서 모시고는 왔으나 자식으로서 한 일은 거의 없는 셈이다. 아버지가 일처리를 척척 다 하고, 병원비까지 스스로 결제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카드로 계산하려고 지갑은 열었으나 아버지 카드가 자동 결제 등록이 되어 있기에 내 카드는 슬며시 제자리로 들어갈 수밖에.  


약국서 약을 타면 아버지는 성분을 꼼꼼하게 따지면서 지난번 것과 비교를 한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아무 생각 없이 지어 먹는 나와는 차원이 완전 다르다. 엄마는 본인이 복용해야 할 약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아침저녁으로 신경을 써서 약을 챙겨드리는 아버지가 옆에 찰딱 붙어 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한테 약봉지와 물컵을 갖다 드리는 아버지 모습은 우리한테 참 익숙한 풍경이었다.

"내가 아프면 누가 엄마 병원 데려가나?"

"내가 먼저 가면 누가 엄마 약 챙겨주나?"

건강이 더 안 좋아 보이는 엄마를 더 많이 걱정했기에 약을 건넬 때다다 하시는 말씀을 건성으로 넘기곤 했다.

엄마가 읊는 시를 그대로 믿고 싶다. 지금까지 힘겹게 살아왔던 세상이 아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다고.

'푹 쉬세요. 이제부터 엄마는 저희가 모시고 다니고, 약도 잘 챙겨드릴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건강에 자신하던 아버지가 코로나 백신 3차 접종을 받은 이후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척수염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잘 되었는데 이렇게 세상을 떠나실 줄 누가 알았으랴. 갑자기 우리들 곁을 떠나신 게 애통해서 엄마는 자주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나이로 보면야 아까운 건 아니지만 고생만 하다 잡숫지도 못하고 가신 게 너무나 아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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