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좀 업어주지...
무료한 저녁, 소파에 걸터앉아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별다른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허리를 좌우로 굽히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발목에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한때 선명했던 그 자국은 이제 손끝으로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사라져 가는 그 흔적이 이제는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이 흉터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것이다. 신접살림을 연식이 오래된 낡은 집에서 시작했다. 그 낡은 집에 각종 벌레는 물론, 심지어 가끔가다 마당에 쥐가 지나갔다. 무섭고 징그러웠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벌레 약도 뿌리고 소독도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해결책으로 고양이를 키우기로 했다. 그 당시 오일장에 고양이 새끼를 팔고 있었다. 거기서 족보도 없고, 혈통도 없는 낭만 고양이 한 마리를 사 왔다. 흰색과 검은색이 젖소 무늬처럼 있는 고양이였다.
애완센터에서 사 왔으면 사료나 고양이용품을 같이 샀을 텐데 오일장에서 덜렁 고양이만 들고 왔다. 당연히 고양이 먹을 것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료 사러 나갈 수가 없었다. 냉장고를 뒤져봤다. 우유가 있었다. 한참 뒤지다가 참치캔도 찾았다. 오늘만 이걸로 먹이고 내일 사료를 사야겠다 싶었다. 우유를 접시에 담았다. 참치캔도 땄다. 참치캔 뚜껑이 잘 안 열렸다. 힘껏 위로 들어 올렸는데 완전히 다 열리지 않았다. 캔 끄트머리에 뚜껑이 그대로 달린 채로 안 열리는 부분을 놔두고 캔뚜껑을 뒤로 꺾어 젖혔다. 고양이는 배가 고팠는지 참치캔에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먹었다. 새끼고양이라 그런지 다 먹지는 못했다. 남은 참치캔을 싱크대 아래 우유접시 옆에 놔뒀다. 나중에 또 먹고 싶으면 먹겠지, 생각했다.
한 밤중에 잠을 자다가 목이 말랐다. 저녁에 맵고 짠 음식을 먹었는지 물을 자꾸 찾았다. 불도 켜지 않고 대충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뭔가 발에 차였다. 그리고 찌릿한 아픔을 느꼈다. 발에 챈 것도 아팠는데 그 반대 발이 더 아팠다. 남편을 소리쳐 불렀다.
“불 좀 켜줘 봐! 나 너무 아파!”
잠결에 일어난 남편은 눈을 비비면서 스위치를 켰다.
“으악!”
불을 켠 남편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도 불을 켜자마자 다리를 쳐다봤는데 아킬레스건 쪽에서 피가 흥건하게 나와서 바닥에 흘렀다. 참치캔이 왼발에 차이면서 날카로운 뚜껑 부분이 내 오른발 발목을 날카롭게 벴다. 바닥은 내 피와 쏟아진 우유, 먹다 남은 참치 찌꺼기로 난장판이었다.
“나 너 못 업어! 걸어야 해! 걸어! 알았지? 네가 걸어서 병원 가야 해!”
남편은 나를 병원까지 어떻게 데리고 갈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내 몸무게가 쬐금 나가긴 하지만 제일 먼저 든 걱정이 못 업는다는 걸까? 결국 발목을 수건으로 싸고 남편 어깨에 기댄 채 왼발로 깡충깡충 뛰면서 차까지 이동했다. 디즈니 공주님 안듯이 두 손으로 내 어깨와 두 다리를 살포시 들을 수 없다는 건 안다. 그건 나도 인정. 그렇게 안기엔 난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업을 수는 있을 것 같았는데 남편은 단호했다.
병원 응급실 문 앞. 갑자기 무서워졌다. 눈물이 나왔다. 다친 발목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면서 걸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응급실 입구에서 더 이상 못 들어가고 그 자리에 서서 울었다. 응급실 전체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남편은 어쩔 줄 몰라 접수실 갔다가 의사 부르러 갔다가 간호사 붙들고 사정했다가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더 무서워서 더 크게 울었다. 잠을 자다가 바로 온 거라 무릎까지 오는 요란한 치마잠옷차림이었다. 거기다가 내 배가 불뚝 나온 부분에 세숫대야만 하게 파란 도라에몽이 그려진 그런 잠옷이었다. 뚱뚱한 여자가 도라에몽 그려진 잠옷을 입고 응급실 입구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응급실은 아비규환이었는데 내 울음소리는 거기에 한술 더 보태고 있었다. 한참 후에 치료를 받으면서도 계속 울다가 의사 선생님에게 핀잔을 들었다. 더 크게 울어 제꼈다.
발목 흉터를 쓸어 만져봤다. 이제는 희미해져서 어디가 흉터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떠난 후 처음 본 흉터였다. 그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흉터였는데 지금 보니 소중한 흉터가 돼 버렸다. 손으로 쓸어 만졌다. 생생히 생각난다. 나를 업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말했던 남편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 괘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