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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은 작가 Nov 24. 2018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시 필사를 하며 쓰는

첫눈이다.

'첫'이란 단어도 설레는데 거기에 '눈'이라니.

스산함에 숄을 걸치고  창 밖 나무 위에 쌓이고 있는 하얀 눈을 한참 바라본다.



'소복소복'이란 표현보다 이 풍경에 더 어울리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지금은.


집사람이 출근한 토요일 아침,

치호와 눈 내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본다.


포도를 먹고, 사과를 깎아 입 안에 넣어 사각 거리는 식감을 느끼며 라디오를 튼다.

버섯을 쫑쫑 썰어 된장을 끓인다.


"배고파"

배고프다는 치호와 된장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실랑이를 한다.

아이는 식탁에서 내려가고 오물 거리며 하얗게 눈이 내린 창가 앞에 선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오늘이 무척이나 그립겠다- 하는 순간.

유독 아름다운 순간은, 그 시간 속에 숨 쉬고 있으면서도 분초가 흐름이 아깝다.

찬란하게 빛나는 치호와의 오늘 아침 평온한 이 풍경이 그렇다.


눈이 마주치면 씩- 웃어주는 아이가 밥을 오물거리며 뛰어놀다

식탁으로 달려와 내가 먹는 밥을 달라 입을 벌린다.

종알거리는 작은 입에 밥을 넣어주고 오물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달려와 내게 안기는 아이가 있고,

라디오에선 장필순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된장냄새가 집안에 번지는 그런 아침.

첫눈이 내린, 내 서른여섯의 겨울 아침.


찬란하게 아름다운 순간의 아침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녹기 전의 아름다운 눈처럼,

첫눈을 맞이하는 설렘처럼,


그리고 시처럼. 아름다운 눈이 내리는 날.

첫눈 오는 날, 나는 너를 만나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샌 시간이 오면 그리워질 오늘의 너와 나.

그 시간이 오면

첫눈 오는날 우리 만나자.

그때는 너와 내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

어느 따뜻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눈을 마주보며

어떤 침묵도 어색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그 날의 낭만도, 오늘의 낭만도


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 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2002/열림원







첫눈 오는날, 201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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