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조각글 06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라 Sep 07. 2023

첫사랑 망각

Oblivious First Love


나도 분명 누군가의 첫사랑이었겠지. 나의 첫사랑을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이건 다음번에. 내 기억에 첫키스는 스물세 살에 집 근처 놀이터였는데, 사실은 여섯 살에 유치원 버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유치원 동창인데, 등원버스에서 보란 듯이 뽀뽀했대나. 엄마는 그것도 기분 나빴는데, 더 큰 이슈가 터졌다. 언젠가 우리 집에 온 그 애에게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를 줬는데 그 어린애가 배부르다고 남기고, 싸주겠다니까 맛없다고 했단다.


감자 샐러드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냐면, 감자를 일일이 삶고, 껍질을 까고, 그걸 다 으깨야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오이를 미리 잘게 썰어서 소금에 절여두고, 시간이 지나면 물기 없게 꽉 짜내야 하고, 계란도 알맞게 삶아 껍질을 다 벗겨서 으깨야하고, 햄도 알맞은 크기로 다져둬야 하고, (스팸은 너무 짜니까 슬라이스 햄 정도가 좋다.) 마요네즈의 양도 잘 조절해서 만들어야 한다. 노동의 가치를 모르는 넌 사윗감으로 아웃이다 이 자식아.라고 생각했다나.


근데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이름도 모르고 걔가 해바라기반이었는지 풀잎반이었는지 장미반이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이 동네에 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걔는 아마 나보다 작았을 것 같다. 원래 유아기 때 여성이 남성보다 무릇 큰 편이다. 물론 지금도 지하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걸을 때 나보다 큰 남성을 만나기 어려워서 항상 통탄한다. 지금쯤 키는 몇일까. 걔의 첫사랑은 나였을까? 그럼 날 기억해 주려나.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려나.


그다음에는 동생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을 앞두며 청춘을 낭비하고 있는데, 동생 놈이 와서는 '내 친구 첫사랑이 누나래'이러는 것이다. 어쩐지 다짜고짜 장문으로 졸업 축하한다는 문자를 받았던 것 같다. 접점이 전혀 없는데 어떤 점에서 날 좋아했을까. 


"근데 걔는 왜 고백을 안 했대?"

"고백했으면 받아줬을 거야?"

"아마 아닐걸."

"근데?"

"궁금하잖아, 왜 좋아하는지. 뭐가 그렇게 좋았대?"

"몰라. 안 궁금해."

"내가 궁금하잖아."

"누가 혈육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하는 게 썩 유쾌하지 않거든?"

"걔 우리 집에 온 적도 있었나?"

"집에 있는 누나의 본모습을 봤으면 누나 좋아하기 힘들지"

"야, 그마저 좋아해야지"

"... 멋있었대. 회장이라서"


나는 입시에 자기소개서 한 줄이라도 써먹으려고 동아리 회장이라도 맡았던 건데, 내가 참 멋있었구나. 내가 동아리 회장으로 하던 일은, 동아리 담당 선생님 대신 출석 부르고 집에 가라고 한 것뿐이었다. 아니, 같은 동아리였나? 그래 어쩐지 낯익은 이름이더라. 왜 드라마나 소설 보면 동생 친구랑 사귀고, 친구 동생이랑 사귀고 그런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닌가 보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나는 그때 선생님이랑 학생이 연애하는 내용의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을 막 찾아보고 그랬다. 어른을 동경해서, 어른을 만나고 싶었지 학생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뭐? 지금은 학생 만나보고 싶다. 귀여운 맛이 있잖아. 아저씨 같다고? 뭐 어떻습니까. 진짜 학생을 만나서 어째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가 레옹도 아니고, 험버트도 아니고. 막상 학생이 나 좋다고 달려들면 돈 몇 푼 쥐어주고, "학생, 마라탕 먹으러 가~"하겠지. 옛날에는 고등학생 몸에서 떡볶이랑 튀김 냄새가 났는데, 요즘 애들은 마라탕 냄새가 나더라.


아무튼, 모두들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더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누군가의 고백도 못해보고 끝난 첫사랑 누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걔한테는 내가 아직도 아련할까? 아, 이것도 첫사랑은 아련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과 선입견인가. 지금은 뭐하고 지내니. 엊그제 예비군 훈련 다녀왔겠지. 혹시 면제였니? 동생에게 처음 들었을 때에는 얼굴이나 뭐라도 기억났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잘한 첫사랑들을 스쳐왔을 것 같은데, 일일이 아쉽다. 어쩌면 내 동기 중에 하나가 날 흠모했을지도 모르겠고, 동생의 군대 선임이나 후임이 날 사랑했을지도. 첫사랑 이야기를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걸까. 나한테 그런 사주가 있나. 안녕, 수많은 A들아 B들아 C들아 D들아.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

이전 05화 사람 많은 카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