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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Aug 27. 2020

나의 아픔에서 비롯된 아이의 아픔

결핍에서 시작된 관심받기위한 행동

 아이를 낳고 한 달 뒤, 우연히 받게 된 병원 검진에서 갑상선의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곧바로 종합병원으로 이관,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다. 어린 시절 감기도 잘 안 걸렸을 만큼 튼튼함을 자랑하던 나였다. 홍역으로 병원을 갔던 것을 제외하면 병원에 방문한 횟수도 손에 꼽힐 만큼이었다. 성인이 되었을 땐 며칠 밤을 새우며 일을 해도 끄떡없었을 만큼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그런 나에게 ‘갑상선암’ 선고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그것도 갓난아이를 둔 나에게...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모든 것이 우울했고, 이 모든 상황이 부당하게만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갑상선암’을 확신하는 병원에서는 수술을 재촉했다. 나는 아직 신생아인 아이를 생각해서 조금 더 모유 수유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병원에서는 말렸지만 나의 고집대로 아이가 8개월 차 되던 그때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후 나의 곁에는 아이가 있었다.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은 없었고, 아이의 육아는 전부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첫째 아이는 아픈 엄마 곁에서 고스란히 나의 아픔을 다 보고, 느끼며 자랐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아이는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늘 관심받기 위한 행동, 사랑받기 위한 행동을 격하게 했다.     



〔애착(attachment): 양육자나 특별한 사회적 대상과 형성하는 친밀한 정서적 관계〕

볼비(Bowlby, 1969)에 의하면, 애착은 부모 각각에 대해 아동이 가지는 강하고 지속적인 유대이다. 특히 생후 1년 동안 유아와 양육자 사이의 초기 관계의 질이 애착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원을 보내며 지낸 지난 5년간의 시간 동안 아이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주위의 권유로 놀이 치료를 시작했다. 놀이 치료는 일주일에 한 번 40분가량 진행되었다. 선생님과의 놀이를 통해 아이의 심리를 파악하고,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또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원만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과정이었다. 집에서 먼 곳에 센터가 있어 힘들었지만 놀이치료는 1년간 꾸준히 진행되었다.  한데 놀이치료만으로는 아이에게 큰 효과는 주지 못했다. 놀이 치료를 받는 중에도 아이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의 곡선을 타는 시기가 많았고, 안정되는가 싶으면 또다시 제자리걸음이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가볍게 보이틱 증상까지도 심하게 나타나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이 육아에 힘써봤지만 아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점점 안 좋은 상황을 만드는 아이를 보며 나는 지쳐갔다. 그 시간들 속에 엄마인 나와 아이 둘 사이는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첫째 아이는 유전적으로 받은 큰 등치. 야생마 적인 성향을 타고나 지극히 남성적이었다. 자라나면서 습득했을 난폭성과 폭력성은 커가면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엄마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나타난 정서불안과 산만함.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틱 장애까지 가지고 있었다. 반면 수술 후 평생 약으로 갑상선 기관을 대체해야만 하는 엄마인 나는 늘 부족한 칼슘과 갑상선 수치의 이상으로 나날이 손, 발 저림과 피곤함은 더해갔다. 출산과 갑상선암 수술로 체력은 늘 고갈되어 있었다. 모든 상황을 따지고 보자면 아픈 엄마에게서 못 받은 사랑이 아이에게는 결핍이 되었고, 그 결핍이 아이의 이상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기관이나 선생님들과 상담을 해보면 늘 말씀하시는 것이 아이와의 애착 관계였다. 아이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에 나는 많이 아팠다.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것이 아픈 것임을 인지하지 못 한 채 그저 쉽게 피로를 느끼고, 지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나는 늘 자신에게 불만이었다. 아픈 나를 돌보기는커녕 불만을 쌓아 나를 괴롭혔다. 그런 과정에서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왔다. 우울증으로 인해 나의 감정 기복은 점점 더 심해져 갔고, 결국 그 모든 것을 아이의 탓으로 돌리며 미워하고, 원망했다. 아이의 작은 실수도 내 눈에는 가시로 보였고, 남편의 서운한 행동 또한 매일 같이 나와 함께 있는 아이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필요로 했고,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 했던 그 시기에 나는 미움과 원망을 준 것이다.


 “나는 나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고, 아이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다.”


 우리 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결핍이 되었고, 그 결핍된 사랑을 찾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로 표현을 하고 있었다. 관심받기 위해 울고 떼를 부리고, 위험한 행동을 다. 엄마에게서 받은 미움과 원망을 또래 아이들에게 난폭함으로 표현해내며, 간혹 폭력으로 대응했다. 엄마에게서 못 받은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다 보니 늘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엄마의 사랑 탓이었고, 당사자인 엄마에게 요구해야 했는데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채우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결핍의 대가 지금의 내가 고스란히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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