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의 시선 (은나무)
아침부터 괜히 웃음이 났다.
가방을 열었는데, 있을 리 없는 물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정장 양말 한 켤레.
도환 씨의 왕발 양말.
“아 진짜… 이게 왜 여기 있어.”
어제 집에서 빨래를 개다가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접어 넣었나 보다.
립밤, 쿠션, 카드지갑 사이에서
너무 당당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그 양말이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게 마음을 간질였다.
집을 나서며 문득 생각했다.
‘이거… 돌려줘야 하나?’
근데 또 그 생각이 바로 뒤집혔다.
‘아니, 어차피 오늘 또 가잖아.’
그렇게 나는 연락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집으로 향했다.
“도환 씨! 나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가 놀라지도 않고
“아침 먹었어요?” 하고 묻는 게
이제는 너무 익숙했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땐
괜히 슬리퍼도 조심조심 신었는데,
이젠 어느 칸에 뭐가 있는지도 다 안다.
냉장고 문을 열면
내가 좋아하는 맥주가 보이고,
욕실엔 내 칫솔이
그의 파란 칫솔 옆에 아무렇지 않게 꽂혀 있다.
이상하다.
분명 남의 집인데
어색하지 않다.
“아, 맞다. 도환 씨 이거.”
나는 가방에서
그 양말을 꺼내 흔들었다.
“이게 왜 은하 씨 가방에서 나와요?”
“그러니까요. 아침에 발견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이런 사소한 해프닝이
괜히 좋았다.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서로의 물건이 자연스럽게 섞여버린 게.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그가 내 쪽으로 립밤을 밀어놓았다.
“이거, 어제 놓고 갔잖아요.”
그 립밤.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걸 나는 이미 봤다.
괜히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도.
“아… 그거 거기 있었어요?” “네. 계속 눈에 밟히던데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누군가의 공간에
내 물건이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
“그 립밤 그냥 여기 두면 안 돼요?” “왜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건데.” “그래야 은하 씨가 매일 오잖아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도
장난처럼 받아쳤다.
“뭐야, 지금 프러포즈 예고편이에요? “
순간,
괜히 심장이 한 번 더 뛰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반쯤은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식탁 위에
그의 양말과
내 립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물건이
이상하게 잘 어울려 보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금씩 섞이다 보면
어느 날은
어디까지가 내 물건이고
어디부터가 그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날도 오겠지.’
그날이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났다.
아직은
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서로의 물건이 먼저 스며드는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햇살이 잘 드는
느긋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