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환의 시선 (유블리안)
주말 아침,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습관적으로 물을 마시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가, 무심코 시선이 멈췄다.
무채색 일색인 내 투박한 원목 책상 위에, 앙증맞은 분홍색 립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하 씨의 것이다.
‘어제 놓고 갔구나.’
평소라면 “어지럽게 이게 뭐야” 하고 치웠겠지만, 나는 그 립밤을
집어 들어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복숭아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마치 그녀가 지금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욕실 칫솔꽂이에는 내 파란색 칫솔 옆에 그녀의 노란색 칫솔이 나란히 꽂혀 있다.
방문 손잡이에는 그녀가 두고 간 곱창 밴드가 걸려 있고, 냉장고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맥주와 초콜릿이 내 생수병들 사이를 점령하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에, 어느새 ‘지은하’라는 영역이 야금야금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침범이 전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이 낯선 물건들이 내 방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처럼, 그녀도 내 삶에 완벽하게 녹아든 것 같아서.
그때였다.
띠띠띠 띠띠띠, 띠리릭-
현관에서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쾌한 문 열림 소리가 났다.
“도환 씨! 나 왔어요!”
초인종을 누르거나 미리 연락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 나는 이 순간이 너무나 좋았다.
손님이 아닌, 마치 이 집의 안방마님처럼 편안하게 들어오는 그 모습이.
“어? 은하 씨 일찍 왔네요? 아침 먹었어요?”
“아니요, 배고파서 오는 길에 샌드위치 사 왔어요. 도환 씨랑 같이 먹으려고.”
은하 씨가 식탁에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익숙하게 외투를 벗었다.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맞다. 도환 씨, 이거.”
“응? 이게 뭐예요?”
그녀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건 다름 아닌 내 회색 정장 양말 한 켤레였다.
“이게 왜 은하 씨 가방에서 나와요?”
“푸하하, 그러니까요. 어제 우리 집에서 빨래 개다가 딸려 들어갔나 봐요. 아침에 가방 열어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내 파우치 옆에 도환 씨 왕발 양말이 떡하니 있으니까 진짜 웃기더라고요.”
은하 씨가 양말을 흔들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내 양말이 거기까지 진출했네요. 이러다가 은하 씨 집 안방까지 점령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반쯤은 점령당했거든요? 안방에 도환 씨 충전기랑 후드티도 있잖아요.”
우리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내 양말을 건네주고, 나는 책상에 있던 립밤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는 이 사소한 행위가 묘하게 에로틱하고, 또 묘하게 가정적이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은하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편안한 옷차림, 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자연스러움.
문득, 머릿속에서 미래의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주말에만 만나는 게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칫솔 두 개가 나란히 있는 풍경.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오면 현관에 그녀의 신발과 예쁜 아기가 나를 반기는 풍경을 말이다.
‘이 사람이랑... 같이 살면 매일이 이런 기분일까?’
반동거 같은 지금의 느낌도 좋지만, 이제는 정말 ‘반(半)’을 떼어버리고 온전한 ‘동거’, 아니 ‘결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불끈 샘솟았다.
“은하 씨.”
“네?”
“그 립밤 말이에요. 그냥 거기 계속 두면 안 돼요? 칫솔 옆에.”
“왜요? 저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건데?”
“그래야 은하 씨가 그거 바르러 우리 집에 매일 올 거 아니에요.
아니면... 아예 그냥 짐 다 챙겨서 들어오든지.”
내가 툭 던진 농담 섞인 진담에, 은하 씨의 눈이 동그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눈꼬리를 반달처럼 휘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뭐야, 지금 프러포즈 예고편이에요? 이렇게 훅 들어온다는 거죠?
호호. 월세 내기 비싼데 고민 좀 해 볼까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거절이 긍정의 신호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식탁 위에는 내 양말과 그녀의 립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물건이 묘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꼭 우리 둘처럼.
서로의 물건이 섞이고, 공간이 섞이고, 마침내 삶이 섞여가는 날.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지는 완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