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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Mar 23. 2019

‘네고’의 심오한 세계를 아십니까?

나는 택시에서 암하라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프리카에서 살 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일까?능수능란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외국어 능력?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베프가 될 수 있는 친화력? 정전과 단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활력?

내가 생각하는 필수 역량은 뻔뻔할수록 빛을 발하는 네고 스킬(Negotiate), 흥정력이다.



네고 초보, 아프리카 택시에 도전하다!

에티오피아 택시의 모습. 거리에 정말 많다 @google


아디스아바바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하게 택시를 탈 일이 생겼다. 생애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택시를 잡은 것이다. 에티오피아 택시는 미터기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터기가 달린 택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공항에서 흥정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고자 비싼 요금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외국인들의 주된 전유물이다.

내가 택시를 잡는 곳은 공항이 아니고, 나는 가난한 외노자이며, 가려는 거리도 고작 15분 남짓이다.

미터기가 없는 택시를 잡았다.


“안녕, 나 사르벳 가고 싶은데 요금이 얼마야?”

“안녕, 마이 프렌드! 내가 합리적인 가격(reasonable price)에 줄게. 일단 타.”

“음, 아냐 괜찮아. 나 다른 택시 찾아볼게.”

“잠깐잠깐, 왜 그래, 마이 프렌드. 원하는 가격을 말해 봐.”

“얼마로 줄 수 있어?”


에티오피아에서 택시를 탈 땐 주의사항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가격을 합의하기 전엔 절대 먼저 타지 않는다. (막상 도착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책정되는 걸 볼 수 있다.)

둘째, 처음 요금에서 무조건 깎는다. (미터기는 없지만 외국인 프라이스는 있다.)

셋째, 튕겨본다. (그렇다고 진짜 튕겨진 적은 아직 못 봤다.)


나는 이 세 가지 이론을 기반으로 택시를 고르고 또 골라 탔다. 처음 부른 가격에서 절반을 깎는 쾌거를 거두었다. 매우 뿌듯했다. 어쩌면 나는 협상의 천재가 아닐까?


그리고 내가 탄 가격이 현지인들이 타는 것보다 3배는 비싼 가격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르벳까지 250 비르에 갔다는 내 말에 직장동료, 요하네스가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은 80 비르에 가지만, 그 정도면 그렇게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마이 프렌드라던 택시기사가 처음 부른 가격은 500 비르(약 25,000원)였다.


이게 내가 에티오피아 현지어, 암하라어를 배우기로 결심한 다소 불순하고도 확고한 계기였다.



암하라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암하라어 알파벳과 발음. 매우 어렵다


암하라어를 배우기로 한 동기가 분명했다. 가장 먼저 숫자를 외웠다. 안드(1), 훌렛(2), 소스트(3), 암스트(4)… 한국에서도 숫자만 한국어로 말할 수 있는 외국인을 만나면 조금 신기할 것이다. 당연히 에티오피아 택시 기사들에게도 어린 동양 여자가 암하라어로 숫자를 능수능란하게 얘기하고 네고하는 건 신기한 광경이었나 보다. 택시 요금이 아주 조금 현지인들의 것에 가까워졌다. 택시 기사들과 어설픈 대화도 시작했다.


“쌀람, 앤댓노.(하이 하와 유.)”

“쌀람 쌀람. 세상에. 너 암하라어 천재구나?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오, 코리아! 6,25 전쟁 때 우리가 갔던 거 알아?”

“응 당연하지. 그거 아는구나”

“그럼! 우리 할아버지가 그 전쟁에 참전했거든. 그러니까 우린 친구야. 나는 기디온이라고 해. 이름이 뭐야?”


택시 덤터기를 쓰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암하라어는 배울수록 본래 의도가 흐려졌다. 암하라어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나의 하루가 조금씩 바뀌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분나를 가져다주시는 아저씨께 ‘아마쎄그날로(감사합니다)”건네면, 놀란 눈동자와 환한 미소가 돌아오는 게 좋았다. 그 미소를 보면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암하라어로 ‘생일’이란 단어를 모를 거라며 굳게 믿고 내 앞에서 깜짝 생일파티를 모의하던 동료들을 놀라게 할 수도, 암하라어로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인데도 ‘유나는 언어 천재다!’ 기분 좋은 칭찬을 들을 수도, 시골에서 만난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몇 살이니, 이름이 무엇이니 물어보고 불러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우리나라가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을 만나면 마음이 열리는 것처럼, 에티오피아도 마찬가지였다. 암하라어를 배우면서 나의 세계, 나의 사람들, 나의 테두리가 넓어졌다.

내민 손을 꼭 잡고 하루종일 함께 다녔다



네고의 심오한 세계를 아십니까?

오늘도 나는 여전히 외국인 프라이스를 내고 택시를 탄다. 암하라어를 배웠음에도 나의 네고 스킬은 여전히 그대로다.


현지어를 배운다고 진정한 ‘네고’의 세계는 지금도, 앞으로도 열릴 것 같진 않지만, 내가 몰랐던 에티오피아와 사람들, 또 다른 세계는 열렸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그 경계선을 넓혀가고 있다.


네고의 심오한 세계는, 언젠간 깨우칠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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