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타임#보고또보기
해리포터를 샀다. 3개월에 한 번쯤, 알라딘에 가서 하는 책 쇼핑은 내 취미 중 하나다. 살 책을 정하고 가진 않는다. 그저 한 바퀴 둘러보면서 그날 책장에 꽂힌 책을 살펴보면서 철제 바구니에 한 권씩 담는 것을 즐긴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 재밌게 읽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 그냥 사고 싶은 책 등 다양하게 구매욕을 자극하는 책들을 담는다. 지난번 산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 냉장고가 텅텅 비지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장을 보는 것처럼 때가 되면 책을 산다. 읽는 기쁨을 기대하면서 사는 그 순간이 좋다.
해리포터를 산 이유는 애인과 본 영화 때문이다. 올해 들어 해리포터 영화를 벌써 두 편이나 봤다. 불의 잔과 혼혈왕자다. 한 번은 영화관에서, 한 번은 내 자취방에서 봤다. 자취방에서 볼 때는 책을 안 본 애인에게 영화에서 러프하게 표현되거나 생략된 부분을 오목조목 알려주곤 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화면을 중간중간 멈춘 채 재잘대는 그 얘기가 영화보다 재밌었던 것 같다. 그 얘기들은 해리포터 세계관을 마음껏 탐방하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에 간 날은 영화를 본 날 고작 며칠 뒤였다. 알라딘 책장에 꽂힌 해리포터 표지를 본 나는 책을 기꺼이 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본 것을 또 보는 걸 즐긴다. 여러 장점이 있어서다. 우선 줄거리 파악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런 독서는 상당히 편하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즐기고 싶은 부분만 즐기면 되어서다. 게다가 디테일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대부분 읽었던 것이라 슥슥 넘어가지만 놓쳤던 부분이나 표현들이 다시금 나를 새롭게 자극하곤 한다. 마지막으론 아는 맛이어서 그렇다. 맛있게 느꼈던 부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복기하며 차근차근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의 감동은 덜하되, 즐기기엔 문제가 없다.
최근 이런 방식의 독서가 늘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도 봤던 작품을 주로 봤다. 그 기점은 일이 바빠지고 나서부터다. 바쁜 업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생각을 쉬고 싶다. 그 상태가 가끔 주말까지 갈 때도 있다. 나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그런 시기가 온다. 한 달 주기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직업이라 작업 마무리 주에 보통 그런 상태가 된다. 그럴 때면 방 안에서 가만히 누워 유튜브를 보거나 해리포터를 같은 것들을 생각 없이 보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킬링타임용 독서나 영화가 좋다.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바빠서 힘들다는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대학생 때만 해도 단순히 바쁘다는 걸로는 힘들다고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니, 그 사실을 나에게 적용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그런 토로에는 충분히 위로를 건넸지만, 스스로 나름 강한 멘탈을 가졌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잣대를 대고 있었다. 지인의 죽음이나 신체가 손상되는 사고를 당하는 등의 큰일이 있어야 힘들다는 표현을 써야 하는 줄 알았다. 근데 잠을 적게 자고 일을 많이 하니까 힘들었다. 신경이 곤두섰고, 속에는 화가 쌓였다. 바쁘면 힘들다는 단순한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가끔 주말에 축 늘어진 내 모습을 보면서 늘 봤던 드라마를 보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옛날부터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바쁘고 열심이셨다. 내가 5살인 해부터 직업을 따로 구한 어머니는 일과 가정 둘 다 놓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대학원 과정도 밟고 지금은 박사 과정까지 도전 중에 있다. 지금도 내가 본가에 내려가면 집에 잘 안 계셔서 오히려 내가 직장 근처로 찾아갈 정도다. 그런 어머니가 가끔 하루 종일 방에서 드라마만 보는 날이 있었다. 당시 나는 주몽이 그렇게 재밌냐고 물었었다. 재밌는 것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데, 똑같은 것만 보는 어머니가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해리포터를 볼 때 내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문득 그것은 어머니가 드라마를 볼 때의 모습과 조금은 닮았을까 생각했다. 생각 없이 보다가 슬며시 픽 웃으시는 그 웃음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화면을 멍하니 보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표정에 특별한 즐거움이나 긴장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저 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