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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 햄버거 가게의 기억이
서른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나는 흠칫 놀란다.
아마도 내 자신감을 재구성한 너의 능력 때문이리라.
그것은 일종의 도취감이었고.
쉽게 지워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랑도 때로 끝난다.
혜정은 자신했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나도 반대했다.
나는 혜정의 남편이
명문대를 나온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학벌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혜정 부부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그녀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예뻤다.
뒷자리에서 조용히 학교생활을 했지만 그는 단연 돋보였다.
그 미모로 내 친구 혜정의 마음을 잡았다.
반면 혜정은 광대와 턱이 발달한 얼굴형에 외꺼풀의 큰 눈을 가진 다소 고집스런 외모로,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과묵하며 똑똑했다
대학 때 그녀는 창이 없는 방에 살았다.
가끔 그녀의 창문 없는 방에 놀러 가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당시에 그녀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주에 열 번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는 길에서 신용카드를 받았다며 학교 앞에서 빵을 잔뜩 샀다.
한창 길에서 신용카드를 신원확인도 안 한 채 뿌리던 시절이었다. 신용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우리는 그녀의 신용으로 산 빵을 함께 먹고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고등학교 앞에 있던 수제비 가게나 지난주 미팅에서 만난 이상한 남자 험담을 하며 잠이 들었다.
지금 그녀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그녀는 울지 않는다. 원래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간 엄마가 안부조차 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언니와 다툰 후에도.
엄마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에서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그 방에서,
길에서 받은 신용카드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녀는 담담했다.
오늘은, 은정이 그녀를 대신해 운다
“사랑한다며. 사랑해서 결혼했잖어. 뭐야 너. 왜 이런 거야.”
흐르륵. 흐륵.
다들 취했다. 이제 곧 12시다.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래도 아직 사랑이 남아있지 않아?.”
아직 결혼을 해 보지 않은 정민이 ‘사랑’을 들이밀며 반문한다.
기혼녀 한 명과 노처녀 둘. 이혼녀 하나.
결론은 명확하다.
“니가 결혼이 뭔지 몰라서 그래. 결혼이 뭐냐면,
니게 니게 아니고 니가 니가 아니게 되는거야.”
은정은 꼬치에 꽂힌 은행알을 씹으며 결혼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결국 자아를 없애야 평화가 지속되는? 뭐 그런거지.”
그리고 사케를 한잔 마신다.
“하나가 되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은정의 빈 잔이 한풀 죽은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내려 앉는다.
“아무것도 안 남는 거. 그게 결혼이라고.”
오늘 네 뒷모습과
오래전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했던
자신만만했던 너의 모습이 겹친다.
가끔 상상했던 우연한 재회가 조금 더 극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결혼한 너와 아직 혼자인 나 말고.
결혼이 無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던 은정이
졸린 듯 테이블 위로 엎드린다.
아무것도 안 남는 것.
너에게 결혼은 어떤 것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