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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Dec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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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6월. - 장마



나 결혼한다.


잊혀진 메일주소.

이름으로 지은 메일주소.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특이한 이름의 너.


장마가 시작된 6월의 공기는 눅진하게 온 방안에 내려앉았다.

산소가 이렇게 무거운 물건인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었다

두 개의 회사가 결이 달라, 자기소개서도 결을 다르게 하느라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휴학하고 재수한 이야기

새로 대학생활을 시작해 3학년 여름에 류시화의 책을 읽고 무작정 인도에 다녀온 이야기

한 달 동안 혼자 그 더운 동네를 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

향신료 때문에 맥도널드만 먹고 8킬로나 살이 쪄서 돌아온 이야기.

학과에서 3년 연속 대표를 지내며 120여 명의 학과생들을 도왔다는 이야기.

최대한 회사의 인사담당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찾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로 각색하기 위해 각종 자기소개서 무용담을 검색하고 있었다.

나는 2년 넘게 고시공부에 매달렸었다.

보기 좋게 2차 시험에서 두 번 낙방하고 방향을 바꾸었다.

나의 자기소개서에는 그간 그렸던 노동수요 곡선이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게임이론 테이블 따위를 그릴 수가 없었다.

나는 깨끗한 공백으로 남겨진 나의 2년을 대신할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구두 만들어 파는 회사는 무엇을 좋아할까

교육 콘텐츠 회사는 어떤 성향의 신입사원을 원할까.

나는 나의 구태의연한 이력에 유일한 MSG를 첨가하기 위해 각종 이야기들을 들춰내고 있었다.



그때 띵똥 도착한  

‘나 결혼한다'


너답다.

제목에 내용을 쓰는 너.

항상 결론만 말하는 너.

과정 없이 결말만 나오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공주님 이야기처럼.


너의 결혼은 그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6월의 어느 날

대학도 졸업하지 않는 하객들이  가득한 단체사진으로 남겨졌다.


뭐 하러 이런 메일은 보낸다지.

헤어진 지가 언젠데.

구질구질하게 -

구시렁거리고는. 얼마 못가 집요하게 그의 결혼식 사진을 찾는다.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미니홈피 계정을 타고 들어가

기어코 그 결혼이 불행함을.

그 결혼식이 불의의 사고(?)로 인한 것임을 확인하려 한다.


사진 속에 그들은 편안해 보였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소박했다.

경건하고 진지했고

정말 사랑하는 연인의 결합으로 보였다.


뭘 기대한 거지.

헛웃음이 나왔다.

사진 속에 아름다운 여인은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 그래. 됐네 -



메일을 휴지통으로 보낸다.

'나 결혼한다'가 휴지통으로 사라진다.


답장은 하지 않기로.

답장은 내 초라함의 증언 같으니.

나는 끝내 휴지통에 들어간 메일을 '완전 삭제' 한다.



조용히 입술을 깨문다.

- 그래. 행복해라.-


그리고 나의 첫사랑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야기 속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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