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신감에 대한 기억은 늘 짧다.
한껏 부풀다가 어느덧 바람이 빠진다.
생각해 보면 작은 계기였던 것 같다.
냉소, 라든가. 지나가는 한마디. 혹은 나보다 더 나아 보이는 인생을 볼 때.
겨우 주입해 둔 가스가 어디로 새어 나가는지 모르게
그저 내 안에 나는 작고 볼품 없어지곤 했다.
겨울이 시작되었고 새 학교에서 두 번째 신입생 시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반수에 성공한 나는, 나보다 두 살 어린 동기들과 새로운 캠퍼스의 풍경에 익숙해져 갔다.
이전 대학에서 사귀던 선배는 내가 반수에 성공하자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는 군인이었고. 그래서 공중전화로 전화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휴가를 나오면 늘 학교 앞 만화가게나 오락실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자신감에 가득 차 그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새로운 학교는 즐거웠고. 친절한 남자들은 많았다.
초조함은 초라함을 낳았다.
어느 날부터 나는 그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첫 이별이었다.
담담했다.
찬란했던 시절이 작고 볼품없어지는 것이 서글펐다.
김 빠진 이별 이후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과외 수업으로 벌어온 용돈을 무슨 바람인지 다르게 벌어보고 싶어서,
학교 앞 햄버거 가게에 갔다.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청소부터.
과외를 하면서 학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 받는 존대와 존중은 타일 바닥 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허둥거렸다.
매니저 언니의 신경질적인 눈길이 따가워 내일 그만둔다고 할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누군가가 내 빗자루를 휙 빼앗았다.
내 빗자루를 앗아간 남자는 신속하게 바닥을 정리했다.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농담을 던지며 여유롭게.
나는 투명 인간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플라스틱 빗자루를 한쪽 벽에 기대어두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내 속을 들여다본 듯 시원하게 사직을 권고했다.
“너 같은 애들 많이 봤어.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으면서 불만만 많은 애들. 그냥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나는 도움을 청하듯 옆에 서 있는 매니저 언니를 쳐다보았다
.
“어제 와서 그래. 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네.”
매니저 언니는 웃었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공부만 해서 그런 거 같애. 00대 다닌데.”
위로 같지 않지만 내 무능함에 대한 변명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기가 살짝 살아났다.
어깨를 펴고 최대한 날을 세워 노려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이 크고, 날카로웠다.
나는 좀 더 매서운 눈빛을 만들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내 의도를 다 읽은 듯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피할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웠다. 비질 하나 야무지게 할 줄 모르는 내가.
다음날, 오늘까지만 하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지, 마음을 먹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근무시간을 옮기겠대. 제가. 널 한번 제대로 교육해 보겠다구.”
매니저 언니는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저쪽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일을 처음 배울 때는 너처럼 시간 맞춰서 오면 안 돼. 적어도 30분은 일찍 와야지.”
전날은 몰랐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키에, 쌍꺼풀 없는 큰 눈, 날렵한 턱선.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였다.
“이리 와봐. 이것부터 하자.”
그때부터였다.
너는 손짓하고 나는 이끌려가는 이야기.
낡고 어두운 주방에서 한껏 부푼 자신감이 그 위세를 잃고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