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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Dec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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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름 - 퇴근길 지하철





어디야?

응. 거기서 봐.



춥다.

에어컨이 강력하게 나오는 열차칸에 탔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여름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늘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낸다.

대체 몇 도인가.

설정온도가 있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한테.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이렇게 에어컨을 펑펑 틀어도 되는 거야?


저쪽에서 커다란 검정 보스턴 가방을 든 아저씨가 열차에 올라탄다.

주섬주섬..

뭐가 나오려나.

수세미? 고무장갑? 아니면 맥가이버 칼. 일지도.

열차 안에 사람들은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모두들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맹렬히 엄지손가락을 움직인다.

아저씨는 출입문 앞에 긴 봉을 잡고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조그만 플라스틱 기구다.

뭐지

다들 힐끔힐끔 본다.

다른 한 손에 들려진 바늘을 번갈아 봐 가면서.


아저씨의 눈에 띵동,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진기명기 쇼가 시간 된다.

그 작은 신통한 플라스틱은 바늘귀에 실을 끼우는 기구였다.

아저씨는 거친 손마디로 나 같은 사람도 쉽게 바늘에 실을 끼울 수 있다며

찰리 채플린이 부활한 듯 크고 과장된 몸짓으로

플라스틱 안에 바늘을 끼우고 다른 한쪽에 실을 걸고는

다시 이은결로 변신하여 바늘을 주욱 잡아 뺀다.

그리고 짠.

실은 바늘구멍 안에-


열차 안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아저씨보다 더 마음이 급해진 사람들.

여기저기서 손을 든다.

어떤 할머니는 할배, 요기 좀 보소!! 다급하게 소리친다.

아저씨 같은데...

아저씨는 눈을 찡긋한다. 그래 물건 산다는데 할배면 어떻고 총각이면 어떤가.

구겨진 지폐, 동전 여러 개... 아저씨는 멋진 공연을 마친 버스킹 공연자처럼

열차 안을 순회하며 신속하게 물건을 내어주고 대가를 받아

엉거주춤 가방을 짊어지고 하차했다.



생일선물로 하나 살걸 그랬나.

그 신기한 광경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옆에 앉은 아줌마의 물건을 내려다본다.

아줌마에게는 실과 바늘은 없기에 좀 전에 그 묘기가 홈쇼핑에 나오는 고데기 퍼포먼스처럼.

허무한 후기를 남기게 될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천 원의 행복으로.



침침한 시력에, 거친 손끝이 둔하여,

손주의 구멍 난 바지 무릎을 꿰맬 수 없는 할머니에게

회식 후 이성을 잃고 귀가한 남편의 찢어진 양복 바짓단을 복구해야 하는 아내에게

학교 운동복 바지를 한 땀만 꿰매 달라는 딸아이의 부탁을 받은 아빠에게

저 물건이 요긴하게 쓰이기를 빈다. 짧게.


다음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어머. 벌써 다 왔나?

북적대는 역에 내린다.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회사에서 일하던 복장 그대로, 해가 저무는 거리로 간다.

나는 누구에게도 잘 보일 곳이 없으니까.

그저 흔한 생일 중에 하루.

그래도 지하상가 어디 즈음 지나치며 거울을 슬쩍 바라본다.

그래도 모르잖아.

바늘구멍에 꿰어지는 그 실처럼,

구태의연한 이 일상에도 뭐 하나 즐거운 일이 생겨날지.

여름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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