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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앞에서 너를 만난 이후
좀 멍한 상태로 앉아 있다.
생일파티는 1차, 2차를 거쳐 3차까지 계속되었다.
번갈아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함께 화내고 또 웃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남편, 시어머니, 새로 만나는 남자친구. 회사에 이상한 여자 동료.
결국 이야기의 소재는 사람이다.
대개 듣다 보면 평가는 감정에 가깝고 사건도 기분에 따라 각색된다.
정민이 요즘 만나는 남자 이야기로 잠시 분위기가 가벼워진다.
정민은 학교 때부터 예쁘고 여성스러워 인기가 많았다.
지금 남자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프로그래머라고 했다.
와인 동호회에서 만난 그 남자는 작은 키에 튀지 않은 얼굴 생김새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만나온 남자들과는 다르게 예민하거나 쪼잔하지 않다며 조용히 웃는다.
그녀는 늘 공허했다.
한껏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정민을 울렸던 학과 선배를 제외하곤.
이후에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
준수한 외모나 타고 다니던 독일산 스포츠카 같은 것들로 내 기억에 남았다.
취기가 살짝 오른 정민이 묻는다.
“너... 너, 괜찮아?”
정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좀 더 깊숙한 질문을 던진다.
“혜정이가 아까 너, 걔 만났다던데...”
나는 잘못 없이 잘못한 사람처럼 말끝을 흐린다.
“응? 그냥...”
“별 곳에서 다 만난다.”
“뭐. 만날 법도 해. 여기 사람 많잖아.”
“그래서?”
“그냥 인사했어.”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다.
사케집 안에 점점 더 사람들이 많아진다.
점점 더 소란하고 조금씩 온도가 오른다.
취기와 온기, 기억과 망각이 뒤엉키며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을 뭉근히 데운다.
“덥다. 그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온도 타령을 해 본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다.
내 눈 속을 살피고 있다.
그녀는 가끔 나를 나보다 잘 안다.
“안돼.”
“뭐가.”
“나는 안된다고 봐.”
“헤헤.”
정민이 미간을 찌푸린다.
“웃지 마.”
“......”
정민은 알고 있다.
내가 연애하는 방식을.
그리고 네가 나의 틀에 맞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너와 이별하고 도서관에 앉아 있는 정민에게 찾아갔을 때도 정민은 저런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뒤편 벤치 앉아 그녀는 말했다.
“내 생각에... 네 연애 방식이 건강하지 않은 거 같아. 너무 상대를 궁지로 모는 거 같아.”
그때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지금 연애 평론 들을 기분 아니야.”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뱉으면 후회해. 이별을 무기로 삼는 건 어리석어.”
“그런 거 아니야. 걔는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아.”
아는 체 하는 정민이 불편해서
나는 내 비열한 연애 방식을 옹호했다.
정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심이야?”
1시간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하철 역에서도, 도서관 벤치에서도.
이별을 말하는 나의 진심은 조건부라서.
“적어도 내가 본 너희 사이는 이 정도로 헤어질 관계는 아니야. 내가 선배랑 헤어진 이유 말 안 했지?”
그녀의 날 선 반응이 낯설어 더 이상 나를 보호할 힘을 잃었다.
“너희 때문이야. 나도 너처럼 사랑받고 싶었어.
걔가 너를 바라보는 눈으로
선배도 나를 봐주었으면 했어.”
정민의 이별의 이유가 우리였다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뭐라고 더 말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7년 전 우리는 정민의 눈에 부러운 연애를 했었고,
또 그녀의 기준에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별을 했기에,
오늘 그녀의 ‘안돼’라는 말이 더욱 단호하게 들린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감싼 채 확인하듯 묻는다.
“안 되는 거 알지?”.
그리고 한 번 더 못을 박는다.
“상황이 바뀌었어. 정말이야. 이젠 그때랑 달라.”
“알아... 나도 이제 늙었어.”
늙었다는 표현이 어색해 또 한 번 웃는다.
정민은 웃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생일이다. 서른 번째 생일. 아니 서른 살이 되는 생일.
서른이 되면 내가 제법 늙어있을 줄 알았다.
내 의지대로 나를 움직일 줄 알았다.
나는 이제 겨우 2년 차 구청 주무관이다.
시장 상인들에게 키오스크 사용법을 알려주거나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있는 과장님에게 보고서를 언제 가져가야 하나를 고민하는.
세상에 어느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어 보인다.
무엇이든 다 될 거라 믿었던 때도 있었다.
나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난 그 겨울도.
내 자신감의 부피가 가장 과장된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