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름 - 기다린다는 것
역을 나와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앞에 빵집이 있다.
늘 붐비는 빵집.
혜정이는 빵을 좋아한다.
그녀를 만날 때면 항상 빵을 먹는다.
그 빵집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린다.
혜정이가 다니던 학교 앞에는 맛있는 빵집이 많았다.
한창 대형브랜드 제과점들이 사거리 목 좋은 자리를 꿰차기 시작하던 때
혜정이는 전통 있는 제과점만 찾아다니며 맛있는 빵들을 나에게 소개했다.
빵을 대하는 그녀는 진지했다.
겹겹이 싸인 패스트리를 내 입에 처음 넣어준 것도
태어나서 먹어본 가장 부드러운 생크림케이크를 생일케이크로 사준 것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쓰디쓴 커피를 처음 내민 것도
모두 그녀였다.
그녀는 밥을 먹지 않고 빵을 먹었다.
내가 김밥천국에서 플라스틱 접시위에 놓인 천 원짜리 김밥을 먹을 때
그녀는 2000원짜리 조각케이크를 먹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달달한 기분이 들었다.
향 없이 쓰디쓴 커피처럼 늘 재미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재미있어 보이는 순간은 한쪽 손에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조명을 받고 찬란하게 반짝이는 빵들을 내려다볼 때.
나는 항상 그녀의 그 작은 행복이 사랑스러워 쟁반 위에 빵을 두어 개 더 담았다.
그리고 배불러 남긴 그 두 덩이는 꼭 그녀의 가방에 밀어 넣었다.
어쩌면 저 북적이는 빵집안에서
몇 개의 빵을 집어 쟁반에 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슬쩍 웃는다.
건물들 사이로 하늘이 저문다.
건물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몇 시 몇 분-
기다리는 사람들.
기다리게 하는 자와 기다리는 자.
그 사이에 팽팽한 긴장.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
다양한 표정들을 본다.
특정장소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기다림 앞에서 작아지고, 또 때로는 설렌다.
늘 기다림에 인색한 나.
그 불안이 어려워 뒷걸음질 치는 나.
기다리다 아무것도 오지 않을까 봐
나는 기다리지 않고 쉽게 자리를 뜬다.
기다림 후에 오는 모든 공허가 두려워
나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서둘러 일어난다.
뭔가 떠오르지만 금요일 저녁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임을 깨닫고
고개를 돌린다.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반기는 사람들.
웅성웅성, 딸랑딸랑 문 여닫는 소리.
버스가 치익 바람을 빼며 서는 소리.
그 순간에 흐르는 음악소리, 노랫말.
이런 것들이 기다림과 함께 오는 것들 일진데.
어쩌면 기다림 후에 오는 것은 작은 행복, 혹은 행운 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도착했다던 그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안에서 내 생일케이크를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냥 서서 기다리기로 한다.
오늘은 그냥 기다려보자. 기다림 후에 오는 그 무엇을.
기다리지 말걸 그랬나.
그때 그냥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라면,
그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갔더라면,
내 서른은 좀 덜 아팠을까.
내 서른은 좀 덜 찬란했을까.
그랬다면.
나는 너를 마주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