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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여유 있는 플랫폼.
기억 위로 지하철이 길게 지나간다.
머리를 올려 묶으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감싼다.
고무줄로 두 번 돌려 감아 고정하고,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살짝 당겨 단단히 잡아준다.
목 뒤에 점이 손 끝에 살짝 스친다.
역을 올라오니 바로 앞에 빵집이 있다.
그곳에 서서 혜정을 기다린다.
늘 약속 시간에 조금씩 늦는 혜정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6시 20분-
표정들을 본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여자,
멍하니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
교복을 입고 경쾌하게 웃는 여자애들.
내 표정은.
저런 표정을 지을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쉽게 자리를 뜨거나 일부러 늦기도 하니까.
빵집 앞에 가로놓인 횡단보도에 퇴근 인파가 차곡차곡 쌓인다.
그들은 붉은 신호등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신호가 바뀐다.
양 끝에 서 있던 무리들이 서로 만나 뒤엉킨다.
누군가는 뛰고 또 어떤 이는 밀려 돌아간다.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기다림이 두려움이라면.
길 건너에서 보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선명한 얼굴.
크고 날카로운 눈. 날렵한 몸.
해석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
선형으로 흐르는 내 시간을 단숨에 뒤엎는 너.
앞과 뒤. 전과 후가 뒤엉키며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점으로 존재한다.
네가 다가온다.
“안녕.”
“으응. 안녕.”
“뭐 해. 여기서.”
“응. 누구 기다려.”
네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남자친구?”
“응.. 으응..”
“머리 묶었네.”
너는 굳은 표정을 풀며 웃는다.
“가끔 생각했어. 잘 있나. 내 거는.”
“......”
“남자친구도 알아?”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
너는 포기한 듯 웃으며 말한다.
“넌 정말 그대로구나.”
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화제를 돌려본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너 호주 갔다고 들었는데.”
“호주 간 건 내가 너한테 알려준 거 같은데.”
너는 이미 반쯤 웃고 있다.
“.....”
네가 호주에서 보낸, 사진 한 장만 달랑 들어있던
국제우편을 떠올리며 다시 할 말을 잃는다.
깜박이는 신호등이 붉게 변하고
차들이 경쟁하듯 자리를 뜬다.
그 후로,
불빛이 여러 번 바뀌도록 말없이 서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를 만나지 않고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마침내 네가 침묵을 깬다.
“남자친구, 잘 만나라.”
신호등이 푸르게 변하고
무리의 사람들 속으로 네가 멀어진다.
전화가 울린다.
“응? 혜정아, 이제 내려? 알았어.”
남자친구가 아닌 혜정을 만나는 나를 들킬까 봐
서둘러 지하철역 안으로 숨어든다.
30분 전보다 확연히 많아진 사람들.
교통카드가 부딪히는 소리.
삑-
네가 돌아서던 소리.
“우리 헤어지자.”
내 목소리가 어땠었는지 흐릿하다.
네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친 이른 새벽,
지하철역 안.
빈 천정으로 내 목소리가 부딪혀 내려왔다.
전날 밤, 며칠째 얼굴을 보지 못한 너에게 원망 어린 메시지를 보내었지만 답이 없었다.
편의점 앞에서 만난 너는 피곤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개찰구 앞에 닿았다.
네가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잘 가.라는 인사 대신,
헤어지자,라는 제안을 던졌다.
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진심이야?”
무서웠다.
“헤어져.”
“너는....”
너는 한숨을 쉬고 전에 없던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이기적이구나.”
그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낫다고 여겼다.
너를 노려보았다.
“너는... 내가...”
너는 같은 말을 두 번 정도 반복했다.
그리고 저 소리만 남았다.
삑.
오랫동안 그 모습이 생각났다.
우리는 그 나이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애를 했지만
이별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의외의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네가 가르쳐준 연애의 장면들을 일상의 곳곳에서 재생한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들이,
나의 연기력이 아닌 너의 연출력 때문은 아니었나 되물었다.
그때 너는 나를 최고의 캐릭터로 승화시키는
연출자이자 상대역이었다.
허무하게 끝난 그 영화에
네가 만든 몇 가지 아름다운 씬들을 반복 재생하며
이후의 연애들마다 비교하고 평론했다.
‘만약에’로 시작한 나의 가정들은 항상
너를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너는 내 서른에 다시 나타났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룬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간에.
삑. 삑. 삑.
개찰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