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AMBY Nov 29. 2024

1

서른, 여름 - 생일




수고했어.

나를 쓰다듬어주던 깊은 눈.


오빠.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병신이야. 머저리.


아니야.

너는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야.

너는 내 삶의 알리바이야.

너만 잘 된다면 나는 아무 상관없어.


오빠

배고파


구뤠?

대패삼겹 먹을까?

과외비 받았어


난 소주도 먹을 거야


낮부터?

좋아. 술은 낮술이 최고지!!



가난한 사랑을 하던 어느 여름에

찌는듯한 더위에도 학교 안을 걷고 또 걸었다.

커피숍에 갈 돈도 넉넉지 않고

공부도 해야 하니

도서관 주변만 맴맴 돌며 못난 자신을 자책하면

그는 낡은 야구모자를 쓰고 그늘진 눈으로

키 작은 여자친구를 내려다보곤 했다.


살면서 사람들은 몇 번의 사랑을 하기도 한다.

운이 좋다면 한 번에 운명의 상대를 만나 영원히 오래오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행복하게 살겠지만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자의던 타의던 아픈 이별을 한다.

나도 그리 운이 나쁜 인생은 아니지만

두 번 정도 깊은 이별을 해보았다.


그중에 한 번은 가난.이었다.

깊고 길고 짙은 터널 속을 함께했던,

20대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가끔.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그 사람은 잘 살까.

착한 그 사람은, 마음이 약한 그 사람은,

아직도 철학자의 삶을 살고 있을까.

아직도 지독하게 가난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 돌아가도 이별하고 말 그 사람의 가난.


그 사랑 덕분에 나는 암흑 같은 시간을 지나 현실의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고마움이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려주지는 못하니까.

내 사랑은 완전히 전부다 솔드아웃.


사랑이 한 톨 남지 않은 이별도 이별이니까. 아프다.

소위말하는 세월에 대한 애도.

그 시절, 그 마음을 가진 내 과거에 대한 애수. 정도만큼.

자기애가 강할수록 멀쩡한 인생 중간중간 아픈 사랑. 같은 것을 들춰보는 횟수도 잦은 것은 아닐까.

나는 자기애가 강했다

그리고 모순적으로 자기혐오나 자기 책망의 골도 깊었다.

그런 기 세고 모순투성이의 나를 온전히 이해한 그를,

나는 결국 버렸다.



나는 해방했다.

긴 세월로부터, 이유 모를 깊은 슬픔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거 같던 허무로부터.


나는 그를 버리고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죄책감. 책임감. 의존성. 그리고 사랑이라 이름하는 그 속박으로부터.



오늘은 생일이다.

더운 여름에 태어난 덕에 내 생일즈음에 사람들의 마음은 그들이 입은 리넨 셔츠만큼 가볍다.

낮은 길고, 휴가를 떠나고, 밤은 뜨거운,

열기에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 솔솔 떠오르는 수증기방울처럼.


그래서 생일이면 마음이 부푼다.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는 그 뜨끈한 바람 속에

내 차가운 영혼을 데워줄 무언가가 실려 있기를.


생일을 수차례 지나온 나에게도

아직은 기대,라는 감정이 남아있다.

나는 젊으니까.


끝없이 펼쳐진 여름하늘 아래 그늘진 너의 눈길 말고.

찬란한 태양처럼 뜨겁고 강렬한 그 무엇.

그것을 기다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