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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Mar 06. 2016

그녀의 '덫' #15

지나간 시간의 경계

1층에 내려가 보니, 시창이 자신의 노란 스포츠카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냥 차 한 대로 가자 형."

"난 집에 올 때 마트 좀 들리려고 하는데?"

"그래 그럼, 내가 예랑씨랑 갈게. 따로 가. 예랑씨! 여기여기!"


팔짱을 끼고 그를 째려보고 있는데, 시창이 다가와 손을 마주대어 합장을 한다.


"진짜 미안. 이제 장난 안 칠게요. 한 번만 봐줘요. 플리즈."


얼굴을 닦아내느라 애를 먹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그의 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니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다음에 또 놀리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네. 약속! 남자답게 약속할게요."


그를 따라 차로 다가갔고, 맞은편에 주차된 차에 올라탄 무경이, 창문을 내려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좀 있다 봐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대답했다.

내가 차에 타자마자 '부웅'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시창.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안전벨트를 매는데, 그런 날 보던 시창이 '피식피식' 웃는다.


"왜요. 이래 봬도 나 무사고 드라이버예요. 걱정하지 마요. 오늘은 그냥 편하게 즐겨요."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대로변 차선에 합류하는 그의 모습이 유쾌해 보였고,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곡을 따라 부르며 흥얼거렸다.

주말 오전의 한적한 도심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그의 차 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느끼는 일상의 여유로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





차는 남산의 한 호텔에 도착하였고, 1층 건물 입구에 서니, 주차요원이 나와 발렛 티켓을 건네준다.

차에서 내려 테니스 라켓을 꺼내는 시창.

그를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지하 2층으로 이어진 수영장과 스파를 지나 조성이 잘된 정원과 분수대가 보였고, 그 뒤에 야외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 곳은, 이용하는 다른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입구에서 통화를 하며 걸어나오는 무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멀리서 날 보고 손을 흔들었는데, 새삼 그 모습에 반갑고 설레었다.

가까이 다가와 라켓이 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 무경.


"예랑씨, 지금 크레인이 집으로 올 거예요. 어차피 위험해서 예랑씨가 올라갈 수도 없을 것 같아, 짐을 전부 빼 달라고 했어요. 괜찮아요?"

"아...... 저야 좋죠."

"집에 도착하면, 예랑씨 짐이 무사히 우리 집에 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네... 고 맙.... 습니다."

"그리고, 매번 고맙다고 안 해도 돼요. 내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는데, 눈이 마주쳤고, 이내 긴장을 풀고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방에서 라켓을 꺼내어 건넨다.


"예랑씨 먼저 쳐 봐요. 쟤도 준비 다 된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뒤돌아 시창을 봤는데, 그는 오두방정 요란을 떨며 몸을 풀고 있었다. 높이 점프를 하며 위협적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건방진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날 부른다.

'피식' 웃으며 무경이 준 라켓을 들고 코트로 향했다.

가볍게 목과 발목을 돌려 준비를 마치고, 시창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팔을 길게 뻗어 '스윙'을 하자, 공이 탄력을 받아 날아왔고, 난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재빨리 공을 받아쳤다.

시창이 휘파람을 불며, 다시 스윙. 계속되는 공 주고받기에 코트를 뛰어다니며 집중하니 온 몸에 땀이 흘렀다.

몸을 움직여 바람을 맞는 이 느낌에 머리가 시원해지고, 생각이 맑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스매싱을 앞두고, 있는 힘껏 라켓을 휘둘렀는데, 공은 시창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정확히 코트인으로 박혔다.

멍하니 공을 쳐다보던 시창이 박수를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나이스! 뭐야, 예랑씨 완전 선수급인데? 이제 안 봐준다. 긴장하라고!"


다시 자세를 잡기 무섭게 날아오는 공을 받아쳤다. 순간 균형을 잃어 방향이 약간 틀어졌는데, 공은 강한 속도로 날아가 정확하게 시창의 얼굴에 꽂혔다.

슬로우 모션을 보듯이 시창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라켓을 놓았다.

놀란 마음에 그에게 뛰어갔고, 그가 코피를 흘리며 원망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어떡해요. 이 피 봐."

"방금 별 보인 거 알아요?"

"진짜 미안해요. 어떡해."


그때, 코트 밖에서 무경이 다가와 시창의 얼굴을 뒤로 젖혀 지압을 해주었다.

잠시 후, 콧구멍에 휴지를 틀어막고, 날 째려보는 시창의 시선을 애써 피해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예랑씨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 얼굴에 쌍코피 터뜨린 거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보복성 같은데?"

"정말 실수였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이 정도면 금방 나아요. 엄살 부리는 거예요."


무경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자, 시창이 무경을 사납게 째려본다.


"나 진짜 아프다고. 뻥 아니라니깐."

"그래그래, 알았어. 이 닥터한테 전화해놓았으니까 가서 치료부터 받고 와."

"알았어. 그럼 먼저 간다. 집에서 봐. 그리고, 예랑씨 어디 가지 말고 꼭 다시 봐요. 꼭."


힘을 주어 경고하듯 말하는 시창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러마라고 했다.

그가 사라지자, 난 한숨을 내쉬었고, 무경이 라켓을 챙겨 정리를 한다.


"어떡해요. 나 때문에."

"괜찮을 거예요. 시창이 학교 다닐 때 맨날 싸우고 다닌 거 생각하면 저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럼 테니스는 다 친 것 같고, 우리 오붓하게 서점이나 갈래요?"

"서점은 왜......"

"이번에 책이 출간되는데, 우리 회사 야심작이거든요. 예랑씨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같이 가요."

"책이요? 무경씨가?"

"음...... 출판사 하거든요. 원래 글도 쓰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니, 언젠가 그의 이름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지나간 시간의 경계' 저자로서, 몇 년 전에 미국에서 먼저 발간된 이 단행본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유명 작가 '손무경' 바로 그였다.

그 책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자신의 인연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설정과 사건들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의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는데,


"그 책 저 봤어요. 맞죠? 시간의 경계"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기해요. 그 책 정말 좋게 봤는데, 무경씨가 그 작가였다니."

"운이 좋았어요. 출판사도 잘 만났고. 그 덕분에 한국에 와서 지금 하는 일도 할 수 있었던 거고. 저한텐 큰 기회였죠."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차는 광화문의 대형서점에 도착하였고, 그와 나는 지하로 내려가 신간 북스 코너로 향했다. 눈에 띄는 자리에 나열된 책들 중에서 한 권을 꺼내는 무경.

천천히 앞 뒤로 책을 살펴보더니, 나에게 내민다.

'너와 함께 했던 놀라운 순간 - 저자 김종호'


"오랜 시간 아동서적을 집필한 분인데, 제가 처음에 한국에 와서 이 분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작가분이 한 달 전에 돌아가셔서 결국, 이 작품이 유작이 되었죠. 선물로 줄 게요 예랑씨.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봐요."

"아...... 네. 그럴게요."


그리고 그때, 무경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날씬하고 큰 키에 편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단아한 얼굴이 지적이고 분위기가 있었다.


"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아, 지나던 길에 잠시 들렸어요. 시연 씨야말로 주말인데 좀 쉬지, 여긴 웬 일로?"

"아니에요. 저도 남편이랑 바람 쐬러 나왔다가 출간 첫날이라 반응 보려고 와 본 거예요."


그녀가 웃으며 무경과 대화를 하다가 나를 쳐다보았고, 그런 나에게 그녀를 소개해주는 무경.


"우리 회사 팀장님이에요. 이번 출간 공동저자이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고시연입니다."


정중하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답하듯, 나 역시 깍듯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 이만."


그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로 향했고, 무경과 난 다른 책들을 둘러보다가 서점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중하게 책을 쥐고 있는 날 보는 무경.


"누군가에게 선물로 책을 준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나는 그 자체가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러게요. 책을 받아본 적은 없는데, 기분이 좋네요."

"그래요? 다행이다."

"무경 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네? 뭐가요?"

"아직 젊은데, 정말 많은 걸 가지고 있잖아요."

"아, 그게 좀 쑥스러운데, 아까 말한 데로 운이 정말 좋았어요. 유학 시절 내내, 마음 터놓고 지낼 친구가 없었고, 자꾸 정체성이 흔들려서 힘들었거든요. 그건 내가 외국에 있다고 꼭 그런 느낌이 든 건 아니었는데, 장소와 상관없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그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자체로 많이 위로가 되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돌아온 거고,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게 정말 안타까웠거든요.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함께 했던 출판사와 연계를 해서 더 큰 시장에 알리는 일을 먼저 시작하게 됐어요. 뭐, 그러면서 회사가 커진거고, 언젠가 작가들이 편하게 작품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에, 건물들을 인수하게 된 거예요. 복합단지로 조성해서 장소와 시스템을 제공하고, 전 그렇게 만들어진 창작물을 홍보하고, 판매하고, 그래서 좋은 작품들이 하나라도 더 빛을 발할 수 있게 하려고요. 그대로 묻혀버리는 게 싫어서."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정말로 근사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 자신이 비교가 되었다. 무언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신의 꿈과 목표를 당당하게 지켜나가는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멋있고 빛이 나는지 그동안 잊고 있었다.

차 안에 미러를 통해 날 쳐다보았는데, 내 눈은 빛을 잃어 희미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처럼 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겼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대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그런 용기가 나에게도 있을까.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샴의 추억'에 등장했던 주인공 '고시연'이 깜짝 출연했습니다. 그녀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애 극장-샴의 추억'편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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