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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고집 Aug 12. 2023

고독한 양치기를 만나다

눈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자유를 꿈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10여 년 전, 독일 괴팅겐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있던 딸을 만나러 간 겨울여행이다. 지금은 한류로 인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당시엔 좋아하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 늘 향수에 젖은 딸은 엄마가 가져와 주었으면 했다. 김장김치를 10kg쯤 싸고 생필품들을 챙겨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독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괴팅겐 중심가

전날까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분주했다는 작고 조용한 도시, 괴팅겐을 딸과 함께 걸으며 동화 속에서만 보던 거위 치는 공주의 동상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와인을 마시고 공주의 그림이 있는 와인 잔을 두 개 샀다.



눈 쌓인 거리를 지나 기숙사에 닿자 딸이 한국인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김치전을 부치고 김치찌개를 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더니 그야말로 환호성이 터졌다. 다음날 벌써 김치는 동이 나고 우린 가까운 마트를 찾았으나 아무리 걸어도 어디에도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는 문을 닫고 한 주간 다들 휴가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지금쯤 시끌벅적 축제처럼 붐빌 서울의 거리가 벌써 그리워졌다. 집집마다 뜰안에 창가에 예쁘게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을 보며 걷다가 가까스로 주유소에 딸린 작은 편의점을 발견하고 우유와 계란을 사들고 들어왔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 본 학교, Brüder Grimm Schule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느라 바쁜 딸은 숙소에 혼자 있는 나를 위해 자유여행권을 사주었다. 계획에 없던 혼자만의 여행을 하게 된 나는 설렘과 호기심으로 지도를 펼쳐 도시들을 보다가 베토벤 생가가 있는 본(Bonn)에 시선이 멈추었다. 라인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고속철도(ICE)로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상관없었다. 평생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이 아닌가.


베토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길. 괴테하우스와는 다르게 베토벤 생가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한참을 달려 본에 내리자 꽃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꽃을 고르는 사람들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이국도시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베토벤 광장에 들어서니 기적처럼 팡파르가 울렸고 거리의 음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가 제일 아끼는 곡, ‘고독한 양치기’였다!  어린 시절 숨죽이며 듣던 가슴 저린 곡을 지구 반대편에서 듣게 되자, 그 낯선 도시가 두 팔을 벌리고 와락 나를 안아주는 듯 전율이 흘러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디카를 들고 정신없이 영상을 찍던 그때의 감격과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어지던 'El condor pasar' 'Sound of silence'를 들으며 귀에 익은 곡들로 편안해져서 마음껏 베토벤 생가를 관람하고 돌아오니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마치 먼 길을 혼자 떠나온 나를 위해 그 시간에 그 곡을 연주한 것 같아 더 특별하게 남았다. 


https://youtu.be/_DakWj9gZW0

Einsamer Hirte


고독한 양치기는 그 겨울 그 순간의 희열로 계속 나를 달리게 해 주었다. 꿈꾸듯 베를린의 보리수나무 거리(Unter den Linden)를 혼자 걸었고, 괴테하우스가 있는 프랑크푸르트, 고성이 아름다운 뉘른베르크의 골목 상점들, 폭설이 내린 함부르크, 하노버, 브레멘의 거리를 눈에 담으며 미친 듯 바삐 걸었다. 그 목말랐던 열흘 남짓의 짧은 독일 여행을 통해서 나는 어느 때 보다도 경제적 자유를 꿈꾸게 되었다.  


베토벤 생가에서 구입한 기념볼펜,


그때 네트웍마케팅이 다가왔고 마음껏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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