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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na Jan 17. 2021

분명해지지 않는 연습


 조용히 가게를 지키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오셨다. 오며 가며 인사를 하긴 했지만 친하다고 생각하진 않은 사이. 불쑥 와서는 OO에게 사진을 보내 달라신다. 앞도 뒤도 없고 무턱대고 휴대폰을 내 손에 쥐어 주니 안 해줄 수 없어 표정 관리가 되진 않았지만 군말 없이 해드렸다. 오늘이 처음은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자주는 아니지만, 매번 이렇게 경계 없이 오시는 게 사실 달갑지는 않다. 귀찮은가 하면 사실 또 그런 건 아니다. 어떨 때 보면 과하다 싶을 만큼 쓸데없는 말들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도와줄 때도 있고 그럴 땐 늘 진심이고 마음도 따뜻해진다. 저런 모습도 나이고 이런 모습도 나이니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부러 깊은 생각을 하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할머니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쓰이고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기준이다. 그게 그냥 느낌일지라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여러 번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사람은 아니니까 나름의 경험치와 이상하게 밀려오는 에너지로 나는 곧잘 사물과 사람을 판단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관계를 맺어가겠지만 나의 경우 그게 좀 분명한지라 판단을 내리기 전엔 갈팡질팡 팡팡팡- 이지만 일단 판단하고 나면 좀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아니고 나랑 좀 맞지 않는다 싶으면 그 사람이 내게 아무리 호의가 있어도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거리 두기를 하고 에너지 쏟는 것을 많이 아까워(?) 한다. 기준이 아니고 기분인가? 좀 애매한 게, 원칙이 있는 건 또 아닌 거 같다. 많은 시간 관계를 맺다가 어느 날 뚝- 하고 끊어지는 실처럼 단번에 끊어져 얼굴조차 보기 싫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냥 딱 한 번 얼굴만 봤는데도 기운이 떨어지면서 곁에 가기 싫은 사람도 있고, 나한테 딱히 호의가 없는데도 구태여 그 사람이 좋아서 카톡이라도 한 번 더 보내고 싶어 안달일 때도 있다. 이렇다 보니 할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느끼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어릴 때보다 많이 논리적이고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씩 이런저런 상황과 기분을 느낄 때면 겉으로만 똑부러져 보이고 유연해졌을 뿐, 마음은 늘 제자리다.      


 자기 생각이 뚜렷한 것과 자기 기준이 너무 많은 것의 차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뚜렷한 것의 목적은 관계의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기준이 많은 것의 목적은 그저 자기방어의 수단일 뿐이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피곤하게 한다. 주변으로 살짝만 고개를 돌려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나 또한 그 축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과 좋을 수는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기대어 편협해지고 있다. 분명해지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다. 정확히는 분명한 척하는 태도를 버리고 싶다. 모호한 경계 속에 누구라도 나의 간격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나를 알아가게 하고 느끼게 하고 살피게 하고 싶다. 나 또한 타인을 알아가는 게 단지 에너지 소모가 아닌 온몸으로 적셔지는 사랑(인류애)이라는 것을 마음에 차곡차곡 담고 싶다.     


 그런 의미로 우리 오늘부터 분명해지지 않는 연습 하기로 해요....어떻게?



<이미지출처>

https://m.blog.naver.com/cokecokecoke_/22213124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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