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01. 희망을 파는 노예
배정환
멀지 않아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준비해야 했다. 지난번에 먼저 나간 친구의 자영업을 보고 있노라니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었다. 직장 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딱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정년퇴직까지 10년은 남았지만, 다 채울지도 미지수였다. 태성은 3년 전에 옆 부서가 통째로 사라지는 구조조정을 목격했다. 그때는 너도나도 위기라며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직장인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금방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흙탕물이 깨끗해졌다고 앙금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런대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누군가 다시 휘저으면 금방 다시 흙탕물이 되어 자신을 휘저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태성은 생각이 많아졌다.
먼저 나간 지석은 자신보다 늦게 입사했음에도 항상 새로운 일을 찾는 친구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결정하고 퇴사할 줄은 몰랐다. 그 친구는 회사일 하면서도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영업을 배웠다. 주말에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일만 하는 지석을 보며 삶이 행복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했다. 친구의 삶은 태성이 원하는 삶과 너무나 멀어 보였다. 술 한잔 하는 자리가 어렵게 마련되었을 때 태성은 이런 질문을 했다.
"지석 씨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나는 행복 그런 거 사치라고 생각해요. 먹고사는 게 해결돼야지 행복이든 뭐든 추구할 거잖아요."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저리곤 해서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는 당연한 말인데 태성은 뭔가 다른 걸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지는 희미하기만 했다.
건강검진에서 대장혹을 떼어냈다며 의사는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자칫 암으로 갈 수도 있었으니 식이요법을 진행하고, 술, 담배를 끊으라 했다. 일을 조금 줄이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했지만, 그게 직장인에게 허용될 일인가? 태성은 언제 나이를 그렇게 먹었나 싶으면서도, 고등학생 딸을 생각하면 아직 젊은 아빠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찍 아이를 낳은 친구들은 군대 간 자녀들도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느꼈다. 건강문제까지 생기고 보니 태성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인생 방향이 흔들릴 때는 먼저 행동한 친구들의 조언이 필요해 보였다. 퇴사한 지석에게 연락해서 술자리를 요청했다.
"잘 지내? 하는 일은 어때?"
"완전 노가다죠.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제 일이잖아요."
"그렇군. 직장 생활보다 나아?"
"차장님 우리가 솔직히 직장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회사가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어요?"
"그건 그렇지."
태성은 지석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가면 고생이지. 직상생활이 제일 안정되잖아."
"제가 작년에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이 20억이 넘어요. 그러데 제 연봉은 5000입니다. 회사 유지비에 내근직 직원들 월급 나간다 해도 이건 너무 터무니없어요. 대한민국에서 부자 되려면 자기 사업을 해야 합니다."
"꼭 부자가 되어야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
"차장님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세요?"
"어.. 대체적으로 만족해."
"그럼 퇴직하고 나가면 뭐 하실 건데요?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요. 50년을 어떻게 사실 건데요? 우리는 희망을 파는 노예예요. 그 희망이 다 떨어지면 끝나는 거죠."
태성은 대롱대롱 흔들리는 술집의 식탁등을 바라봤다. 직장인의 삶이 가녀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석의 말대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안정된 수입이었다. 회사일을 퇴직하고도 할 수 있을지 생각도 해보았다. 플랜트 일이란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자영업이 아니었다. 해외사업이라면 뭐라도 커미션 받는 일을 생각해 보겠는데 자재 입출입하는 태성으로서는 딱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마다 자기 계발을 한다는 신입들을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한 모양이다. 김사원이 퇴근도 안 하고 뭔가 일정을 짜고 있었다. 뒤편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물었다.
"뭐 해? 퇴근 안 하고?"
"아, 이번에 일본 여행 스케줄 짜고 있어요."
"여행 좋네.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이 일만 했는데."
말하고 보니 젊은 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했나 아차 싶었다.
"여행 좋아하나 보네."
"여행 다녀와서 이 콘텐츠로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 올릴 참입니다. 여자친구와 유튜브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여자친구 직장 그만두면 전업으로 콘텐츠 제작해 보려고요."
신세대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격세지감을 느껴졌다. 입사하자마자 주식 공부하고, 부동산 자격증 준비한다고 했다. 무슨 돈과 시간으로 그렇게 준비하는지 모르겠지만, 공부해서 나쁘지는 않을 테니 부럽기도 했다. 회사 생활만은 소홀히 하지 말라고 타이르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회사가 자신의 것도 아니면서 회사부터 걱정하는 자신이 정상인지, 미래를 준비하는 신입들이 정상인지? 최소한 '라테~'를 피하려고 애썼는데, 김은영 대리가 "차장님은 이미 꼰대세요."라고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태성은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태성은 퇴근하고 모임에 참석했다. 대학 동창들인데 일 년에 두 번씩 얼굴을 보고 있었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
친구의 물음에 태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한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딱히 잡히지 않았다.
"그냥 매일 똑같이 지내지. 회사일 하고, 주말에는 필드 나가거나, 등산하고. 그렇지 뭐.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 넌 어때?"
"난 지난번에 명예 퇴직하고 골프고 뭐고 다 끊었다. 돈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야. 살림 쪼그라드는 거 금방이더라고. 퇴직금으로 뭐라도 해보려고 준비 중인데, 딱히 할만한 게 없어서 고민 중."
"난 요즘 젊은 친구들이 뭘 준비하는데 대단해 보여."
"태성아, 너 혹시 나이아가라 증후군이라고 들어봤냐?"
"그게 뭐야?"
"나이아가라 폭포가 세상에서 제일 크잖아? 그런데 상류는 무척 고요하고 조용하게 흐른데 사람들이 배 타고 수영도 한다더라. 그런데 폭포에 가까이 다가가면 물살이 빨라지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이래. 아차 싶으면 늦은 거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네. 우리도 준비하면서 살지 않으면 언제 끝장날지 몰라."
친구들이 맞아 맞아하며 공감했다. 태성도 퇴직이란 말이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물살이 빨라지고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