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것과 이어지는 것
도시 아래엔 거대한 그림자가 지난다.
아스팔트 밑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꿈틀댄다. 거기엔 내가 흘려버린 것들과 타인의 것들이 한데 뒤섞인다. 지하 속 하수관을 채우는 것은 물이 아니다. 벗겨진 피로, 쏟아낸 좌절, 차마 말하지 못한 고통이 서늘한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아침마다 세면대 앞에 선다. 어제의 눈빛, 삼켜둔 말, 낡은 집착이 거울에 스쳐 지나간다. 나는 물을 틀어 그것들을 녹인다. 껍데기를 닦으려, 끝없이 아래로 오물을 떠민다. 씻고, 버리고, 묻어둔다. 어디로 가는지, 곧잘 잊는다.
지하를 관통하는 하수관은 도시의 혈관이다. 그러나 그 속을 지나는 것은 살아 있는 피가 아니라, 잘려나간 감정의 파편들이다. 절망과 비누거품이 섞이고, 후회와 물이 만난다. 그렇게 도시를 사는 개인은 익명의 조각이 되어 흘러간다.
지상에서 각 개인들은 서로 외면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눈을 피하고, 지하철에서는 화면 속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된다. 같은 건물 안 삶이 한 곳에 모이고, 같은 동네 사람들의 일상이 만난다. 지하에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가 된다. 외로운 도시의 역설이다. 단절된 얼굴들 아래, 심연에서만 은밀히 맥박은 이어진다.
입추가 다가오던 여름날, 창밖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하천변 산책로를 집어삼켰다. 도로는 빗물로 가득찼다. 그때, 안전안내문자가 요란하게 울렸고, 시간당 강수량 50mm를 알려주었다. 이내 도로 주변의 우수로의 물결도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습한 냄새가 먼저 스며들었다. 비릿하고 시큼한, 익숙하지만 거부하고 싶은 악취였다. 어쩌면 이것이 삶의 진짜 냄새였다. 포장도, 가공도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을 담고 있었다.
결국 밀어낸 것들은 언젠가 되돌아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감춰왔던 것들은 여전히 그곳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잠재된 무의식처럼 숨어 있었을 뿐이다.
도시에도 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지하일 것이다. 낮에는 가려져 있지만 밤이 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 잊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지하철에 앉아 이동할 때 문득 떠올랐다. ‘나는 도시의 무의식을 가로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갈무리된 지상과 달리, 지하는 혼돈스럽고 원시적이었다. 하지만 그 혼돈으로 지상의 질서가 유지된다. 마치 무의식의 기반 위에 의식이 쌓이는 것처럼.
지하는 죽은 자들만 있는 무덤이 아니었다. 혼자 삼켰던 절망이, 털어놓지 못한 분노가, 어둠 속에서 다른 이들의 것과 섞이는 위로이자 정화의 공간이었다. 혼자라 믿지만, 사실은 수많은 고독들이 함께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리되어, 깨끗해지고, 다시 위로 돌아왔다. 어제의 절망은 내일의 희망으로 변하듯, 지하의 어둠은 끝이 아니라 변화의 장소다. 보이지 않지만,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깊은 밤,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다시 기울인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의 속삭임처럼 들린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삶의 미세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무엇인가를 쏟아내며 살고, 그 흐름은 끊이지 않는다.
내가 숨쉬는 발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타인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도시는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