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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글 Aug 14. 2020

작심 일일이라서 다행이다

느리게 호흡하며 한 걸음씩

퇴사 후에 새 직장을 준비하는 기간이 점차 늘어감에 따라 게으름과 나태함이 깊어졌다.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았던 나는 자유로웠으며 무책임했다.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을 이루지 못해도 삶이 괜찮게 흘러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이미 게으름에 최적화되어버린 상태였다. 성실히 계획을 이행하지 못할뿐더러 이루지 못한 항목을 보며 좌절감만 깊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되었다.


스스로를 통제하기가 어려워 이리저리 고민하며 간절히 기도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K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같은 취업 준비생이었던 우리는 삶을 풍성하게 가꾸기 위해 매일 해야 할 일을 공유하기로 했다.



우리는 전날이나 그날 아침에 하루의 계획을 세워서 서로에게 보내고 하루의 끝에 검사했는데, 하루 계획에 꼭 중요한 항목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작성했다. 일단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성취감이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과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도 작성해놓으니 체크하는 일이 쉬워졌다. 하는 김에 다른 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레 과제에 임할 수 있었다. 억지로 버텼던 삶이 그제야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일을 완성하고 체크를 하는 작은 순간은 내게 커다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계획을 성실히 이루어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친구의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내 하루를 이야기하는 일이 부끄러워서 이전보다 삶을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K에게도 나에게도 떳떳하고 싶어서 이전에 이루지 못한 일을 많이 해낼 수 있었다. 하기 싫은 과제를 꾸역꾸역 해낼 때도 많았지만, 늘 성실한 것은 아니었다.



체크되어있지 않은 항목이 압도적인 날에는 크나큰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서로를 격려했다. 벌금을 걷거나 쓴소리를 한다고 해서 더 성실한 하루를 보낼 것 같지는 않았기에 우리는 위로를 택했다. 아무런 압박이 없는 상태로 과업을 치르고 싶었다. 이미 우리는 해야 할 일들로 충분히 괴롭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와 서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루를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질 것을 기대했다.


벌써 작심 일일로 살게 된 지 5개월 차로 접어들었다. 숲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나무를 보며 걸어온 우리는 어느새 숲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작심 일일에 익숙해져 어떤 식으로든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3월 31일부터 현재까지 매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작은 습관이 내게 준 교훈이 있다. 오래 정체된 삶에서 빠져나가는 법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느린 걸음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나는 빠르게 달리다 숨이 차서 쓰러진 적이 많았다. 급한 성격 탓에 불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속히 벗어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급히 달리는 습관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K와 함께 주변의 환경을 돌아보고 자신과 서로에 대해 이해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법을 택한 후로, 정체된 삶에서 느리게, 그러나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의 문제에만 빠져 살았던 내가 어느새 친구의 아픔에 슬퍼하며 함께 일어서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언제나 시선을 한 곳에 머무르지 말고 더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쏟아야 함을 이 순간에도 다짐한다.


당신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동역자를 붙들며 오늘도 삶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서로를 다독이고 아픔을 위해 기도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순간이 더없이 사랑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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